고려 때 세워진 '홍경사 비'로 국보 7호이다. 1597년 9월초 명군과 일본군 사이의 직산 대전투가 벌어진 소사평 들판은 이 비석 일대이다.

ⓒ 정만진
평양성 수복 후 별로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명군은 일본군과 강화 협상에 들어가지만 풍신수길(?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 조건이 너무나 황당했던 까닭에 끝내 둘은 서로 갈라진다.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왕의 첩으로 내놓아라, 조선 땅 중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일본에 내놓아라…….

1593년 이래 줄곧 군대를 남해안 일대에 주둔시켰던 일본은 1597년 7월초 새로 만든 전함 600여 척을 부산으로 보낸다. 그리하여 전쟁이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8월 14일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9월초 연기현(세종시 북부)을 침탈했고, 곧 이어 40리(12km)를 더 올라와 전의현(천안과 연기 중간 지점)까지 진출했다. 한양에서 불과 150리(60km)밖에 안 되는 지점이었다.

또 피란 보따리를 싸는 조선 조정

조선 조정은 또 다시 피란 떠날 보따리를 쌌다. 선조는 평양에 머물고 있는 경리(經理, 총사령관) 양호(楊鎬)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군대를 출전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명과 조선 사이에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 또한 명군의 출전을 독려하기 위해 줄곧 양호를 면담했다. 이윽고 양호는 9월 6일 밤, 동정군(東征軍, 동쪽을 정벌하러 온 군사, 즉 명군) 중 최정예 8천 명을 뽑아 남쪽으로 내려보냈다.

 

 봉선홍경사갈기비의 특징은 용머리가 정면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점이다.
ⓒ 정만진

양호는 이날 한밤중에 아무도 몰래 군대를 출발시켰다. 같은 명군 중에서도 부총병 해생(解生), 팽우덕(彭友德), 참장 양등산(楊登山), 유격장 안귀(顔貴), 우백영(牛伯英), 천총 이익교(李益喬), 파총 유우절(劉遇節) 등 전투 지휘부에 포함된 장수들을 제외한 나머지 장졸들은 군대가 남쪽으로 내려간 줄도 모르고 잠만 잤다. 이어 양호는 유격장 파새(擺賽)에게 2천 병사를 주어 지원군으로 출병하게 했다.
7일 새벽, 명군은 북상 중인 일본군 선봉대를 직산 10리 북쪽 홍경원(洪慶院)에서 만났다. 홍경원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에 건립된 봉선홍경사라는 큰 절 인근이라고 해서 붙은 것인데, 지금 그곳에는 절 건물들은 하나같이 자취를 감춘 대신 국보 7호 '봉선홍경사 갈기비(喝記碑, 역사를 기록한 비)'가 국도 1호선 대로변에 남아 있어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떠올리게 해준다.

강도 출현이 잦았던 홍경원 자리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 종교 시설인 절과 숙박 장소인 원이 건립된 사연이다. 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했는데,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인데다 강도가 출몰하여 모두들 두려워했다. 1021년, 왕위에 오른 지 12년째 된 고려 현종은 땅을 다져서 평지를 만든 다음 그 위에 절을 짓고 원을 세우도록 조치했다. 컴컴한 습지대를 사람들이 무시로 드나드는 환한 곳으로 바꿔버리면 강도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570여 년 뒤, 단순한 좀도둑 수준의 강도가 아니라 몇 천에서 몇 만 명씩 몰려다니는 군사 강도가 나타났다. 어둠을 틈타 요리조리 몰려다니는 산적이 아니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는 왜적 침략군이었다. 명나라 군대가 남하한 이때에도 일본군 5천여 명이 북상 중이었다.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일본군을 포위하는 명군 사령관

군대를 총지휘하고 있던 명군 부총병 해생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올라오는 일본군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가운데로 중군이 진격하고, 좌우로 갈라진 두 부대로 적들을 양면 포위하게 했다. 그때 문득 사람들이 범 아가리 같은 명군의 진군로 속으로 들어왔다. 해생이 발사 명령을 내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조선인들 아닌가?"

흰옷을 입은 조선인들이 줄을 지어 걷고 있었다. 이 밤에 웬 조선인들의 행렬이란 말인가? 그렇게 주춤하는 찰나, 적들이 먼저 명군을 발견했다. 하지만 대군이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적들은 서슴없이 조총을 난사했다. 

해생의 명령이 미처 떨어질 것도 없이 3면에서 포탄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나발소리, 피리소리, 깃발 흔들어대는 소리, 무기들이 부딪히는 소리……. 요란한 함성, 대포가 터지는 소리, 타오르는 불빛, 말발굽소리, 이제 막 스러져가는 달빛을 받아 번뜩이는 창과 칼날의 섬광……. 비록 조총 몇 발을 먼저 쏘기는 했지만, 삼면에서 달려드는 명군의 기습 공격 앞에서 일본군은 혼비백산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의 일본군은 본대를 다 합쳐도 약 5천 명 수준이었다. 1만을 헤아리는 명군의 절반밖에 안 되는 군사였다. 뿐만 아니라 야밤에 기습을 당했고, 포위된 상태였다. 금세 들판은 일본군의 시체로 가득 찼다.

 국보 7호인 봉선홍경사갈기비의 용이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이 직산 대전투를 벌였던 1597년 9월초의 현장 소사평 들판을 바라보려는 듯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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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전장정이 본대 3천을 이끌고 황급히 달려오고, 북진군 총사령관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의 지원군이 명군의 옆구리를 공격하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 <임진전란사>의 이형석은 직산 일원에서 벌어진 이 전투를 끝으로 '한성 재점령을 목표로 자신만만하게 진격하던 적'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남해) 해안선으로 일거에 철퇴(撤退, 철수하여 후퇴)케 하였는 바 평양성 탈환과 같이 눈에 보이는 전과는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중략) 이여송의 평양 공성 다음 가는 승전의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이이화의 <조선과 일본의 7년전쟁>도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이화는 '9월 초순, (일본의) 북상군 5천여 명과 (명나라의) 남하군 1만여 명의 선봉이 경기의 직산 부근에서 맞부딪혔다. 양쪽 군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큰 타격을 받은 일본군이 먼저 천안 쪽으로 후퇴했다. 이 싸움을 직산 전투라 하는데 치열하지는 않았으나 행주산성의 (1593년 2월 12일) 싸움처럼 적의 진로를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일본군은 그 동안 얕보던 명군에게 타격을 입은 뒤 서울 진격을 포기하고 (경북) 성주 쪽으로 내려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명나라가 평가한 임진왜란 3대 대첩

물론 직산 전투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보내는 쪽은 전투 당사자인 명나라 측이다. 이형석의 소개에 따르면, 명은 평양성 탈환 전투, 행주산성 전투, 직산 전투를 '조선 3대전(大戰)'으로 여긴다고 한다. 행주산성을 제외한 둘은 명군이 주도적으로 싸웠던 전투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직산현청 뒤편, 직산성이 있었던 얕은 산은 전쟁의 흔적은 찾을 길 없고 고요한 평화가 흐르는 신책로로 변해 있다.
ⓒ 정만진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에서 1호선 국도를 타고 평택 방향으로 1km남짓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도로변에 커다랗게 세워져 있는 '국보'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국보 7호인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를 안내하는 이정표로, 정말 크다. 아니, 너무 하늘 높이 솟아 있어 속도를 내면서 달리게 되어 있는 이 국도에서는 자칫 그냥 지나치기 쉽다. 많은 화물을 실은 거대 트럭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허공에 매달았을 터이고, 그 탓에 승용차에 탄 나그네의 눈에 잘 잡히지 않게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직산 전투의 현장에 남아 있는 국보 비석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당연히, 주차장도 대로에 바로 붙어 있다. 비어 있고, 상대적으로 넓은 주차장이 마음에 휑하다. 그렇지 않아도 거리낌 없이 동서남북으로 불어대는 들바람에 황량한 풍경인데, 쌩쌩 지나가느라 이곳에 멈춰선 차량도 없으니 전적지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다만 비석을 해설해주는 안내판의 글이 간결하면서도 명료하여 읽고 나면 조금 기분이 깔끔해진다.  

'천안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 갈기비(碣記碑)
국보 7호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천안대로 2282

1021년(고려 현종 12)에 봉선홍경사라는 사찰을 짓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026년(현종 17)에 세운 비이다. 이곳은 호남과 한양을 잇는 갈래 길로 교통 요지였으나, 갈대가 무성한 못이 있고, 사람이 사는 곳과 떨어져 있어 강도가 자주 출몰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어려웠다. 이에 현종이 불법을 펴고 길가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봉선홍경사라는 사찰과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는 숙소를 세우도록 했다. 사찰 이름 앞에 봉선(奉先)이라 붙인 것은 현종이 선왕(先王)인 부왕 안종(安宗)의 뜻을 받들어(奉) 지었기 때문이다. 최충이 비문을 지었고, 백현례가 썼다.

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인 귀부(龜趺)와 이무기를 조각한 덮개돌인 이수(?首)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어룡(魚龍)의 머리가 정면을 보지 않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고려 시대의 조각과 금석문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석이 어째서 국보로 존중받고 있는지 잘 설명해주는 안내문이다. 비석이 세워진 시기, 이곳에 건립된 이유, 이름의 유래, 작품으로서의 가치 등이 빠짐없이 쓰여 있다. 다만 나는 안내문 끝에 '이 일대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7년 9월초 명나라 군대와 일본 침략군이 큰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직산 전투"라고 부르는 이 싸움과, 며칠 뒤인 9월 16일의 명량대첩 이후 일본은 더 이상 한양 진격 등 공격적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남해안 일대에만 머물렀다'라고 덧붙인다. 아마 고려 현종도 나의 이같은 보탬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는 않으시리라.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군대가, 1894년에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장소로 알려지는 성환읍사무소 동쪽 성환배수지 뒤 월성산에서 바라본 1597년 9월초 명나라 군대와 일본군 사이의 직산 대전투의 현장 소사평 일대. 사진 가운데의 건물은 성환읍사무소이다.
ⓒ 정만진

명군이 주둔한 곳으로 전해지는 월성산에 오른다. 산봉우리의 해발이 99m에 지나지 않을 만큼 아주 얕아 정상까지 간다 해도 등산이라 부를 만하지도 않지만, 성환읍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이다. 어디 성환읍뿐이랴. 저 멀리 평택까지 이어지는 들판이 모두 다 보인다. 명나라 군대가 왜 이곳에 지휘소를 설치했는지 대뜸 가늠이 된다.

호서계수아문


직산현 관아는 유형문화재 42호이다.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군서1길 59-8에 있다.

직산현 관아는 조선 시대 직산현의 지방행정사무를 보던 관청 건물이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내동헌(內東軒), 동헌, 내삼문, 관아문 등 4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

동헌은 현감이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정면 7캄 측면 3칸이며, 중앙 4칸은 우물마루의 넓은 대청이고, 왼쪽에는 2칸의 온돌방, 오른쪽에는 1칸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대청과 온돌방 앞으로 반 칸의 툇마루가 달려 있다.

내동헌은 현감이 생활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건물인데, 오른쪽 3칸은 툇마루가 달린 온돌방이고, 왼쪽 1칸은 부엌이다. 관아의 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문 위에 누각이 있는 2층 형태의 건물이다. 문의 중앙에는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직산현이 경기도와 호서의 경계가 되는 관청이기 때문이다.

성환배수장 뒤편에 서서 바라보면, 시야 오른쪽이 봉선홍경사 갈기비를 우측 도로변에 둔 1호선 국도이고, 왼쪽이 성환읍 사무소 너머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소사평(素沙坪) 들판이다. 그 일대가 모두 직산 전투의 현장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도원수 권율 장군은 한강을 지키느라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우리 땅에서 명군과 일본군이 싸운 전투 현장을, 명나라 군대가 지휘소를 설치했던 야산에 올라 바라보는 이 기분, 어쩐지 묘하다. 게다가 이 산에는 1894년 7월 26일에도 일본군과 싸우던 청나라 군대가 주둔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마음이 애잔하다.

통일 시대를 더욱 기다리게 하는 직산 전투

지금도 한반도에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1950년에는 미국과 소련으로 각각 대표되는 동서양 진영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였다. 공산권의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UN이 연합군까지 파견하여 우리를 도왔지만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은 여전히 건재하다.

광활한 소사평 평야 너머 평택에 있는 미군 부대가 이곳에서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분단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무겁게 들어앉아 있다.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맞이해야 할 '민족사의 결정적 시기'인 통일의 그 날은 언제 오려나.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성환읍 전경이 어쩐지 뿌옇게 느껴진다.   

 직산현청의 '호서계수관아' 누각. 호서수계관아는 충청도와 경기의 경계에 있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이 문 오른쪽 초등학교 담장에 의병장 '이신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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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 전투의 현장을 찾은 김에 직산현 관아 건물과 직산향교도 답사해 본다. 직산현 관아로 들어가는 '호서계수아문(湖西界首衙門)' 앞에 세워져 있는 의병장 '이신의(李愼儀) 시비'의 시 '사우가(四友歌)'도 읽어보고, 관아 뒷산도 걸어볼 생각이다. 뒷산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을 지키는 산성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호서계수아문은 충청도와 경기의 경계에 있는 관청의 대문이라는 뜻이고, 사우가는 소나무, 국화, 매화, 대나무를 노래한 4편의 국한문혼용체 형식의 연작시이다. 하지만 의병장의 13대손 이한창(李漢昌) 선생이 순수 한글로 옮긴 시도 함께 새겨두었기 때문에 감상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직산현청 호서계수아문 앞에 세워져 있는 의병장 이신의 시비

<소나무>
바위에 서 있는 솔 어엿하여 반갑구나
풍상을 겪었어도 여윈 흔적 전혀 없네
어찌해 봄빛을 쪼여도 그 모습이 같은가

<국화>
동쪽 울밑 심은 국화 귀한 줄을 뉘 아는가
봄빛을 마다하고 된서리에 홀로 피니
오오라 청고한 내 벗은 너 말고는 없구나

<매화>
하 많은 꽃 중에서 매화를 심는 뜻은
눈 속에 흰 빛으로 꽃이 피기 때문이라
더 더욱 그윽한 향기는 귀하고도 귀하네

<대나무>
백설이 잦은 날에 대를 보려 창을 여니
온갖 꽃 다 져 버리고 대숲만 푸르구나
때 마침 부는 청풍을 반기면서 춤추네

 이신의 의병장의 '사우가'를 새긴 시비가 호서계수아문 앞에 세워져 있다. 본래 국한문혼용체 형태의 4편 연작시인데, 그의 13대 종손 이한창이 순수 우리말로 옮겨 원작 옆에 함께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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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산향교는 호서계수아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내려와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나타난다. 충청남도 기념물 109호인 직산향교의 주소는 천안시 직산읍 군서리 164-1번지이다. 향교 외삼문 앞 주차장 들머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을 읽으며 오늘의 답사여행을 마친다.

'향교는 조선 시대 관립 교육기관으로 각 고을마다 세워져 교육과 교화를 담당했던 곳이다. 직산향교는 1397년(조선 태조 7)에 처음 세워졌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향교가 처음 세워진 곳은 지금의 위치에서 서쪽으로 200m 지점이었는데, 1588년(선조 21)에 현 지점으로 옮겨지었다. 옮긴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고, 그 후에도 여러 번 고쳐지었다.

이 향교에는 공자 및 중국의 선현과 우리나라 선현(先賢) 18인의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에 제향을 드리는 대성전,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 유생들이 기숙하던 동재와 서재 등이 있었다. 동재와 서재 가운데 서재는 없어지고 현재는 동재만 남아 있다.'(오마이뉴스, 2017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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