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골프공은 17세기에 개발된 페더리 공이었다. 그러나 가죽이 물에 젖어 내구성이 좋지 못했고, 성능 역시 일정하지 못했다. 골프공 개발의 역사는 20세기 초 하스켈 공이 대량 생산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매년 새롭고 획기적인 디자인의 제품이 출시되는 클럽 시장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는 모양을 한 골프공의 중요성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골퍼들이 많다. 그러나 프로 골퍼 중에는 골프 장비 중에 무엇보다 골프공이 선수들의 경기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1968년부터 1984년까지 6번의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리 트레비노는 “지금 같은 골프공이 과거에도 있었다면 당시 최상위 골퍼들은 300야드는 보냈을 것이다. 잭 니클러스는 360야드를 날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잭 니클러스 역시 “요즘 선수들의 끝없이 늘어나는 비거리의 해결책은 공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내구성에 문제 드러냈던 페더리 공

최초의 골프공은 17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던 ‘페더리 공’이라고 볼 수 있다. 골프 초창기였던 15세기에는 나무공을 사용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나무공은 75m 정도밖에 날아가지 않았고 골프에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페더리 공은 주로 소가죽이나 말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속을 거위털로 채웠다. 깃털은 당시 정장용 모자를 채울 만큼의 양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죽과 깃털을 모두 물에 적신 이후 가죽공 속에 깃털을 넣고 꿰매면, 가죽이 마르면서 부피가 줄어들고 깃털은 다시 부풀어오르며 단단한 골프공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페더리 공은 여러 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페더리 공은 모두 손수 꿰매 만들었던 만큼, 완벽하게 동그란 형태의 공을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샷마다 공이 다르게 날아가는 문제점도 있었다. 샷을 하는 순간, 또는 공이 떨어지면서 충격으로 인해 페더리 공이 반으로 갈라지는 경우도 흔했다. 공이 젖으면 비거리가 대폭 줄어 비가 오면 사용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있었다. 특히 골프의 본고장 스코틀랜드처럼 날씨가 변덕스럽고 비가 일상인 곳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단점이었다.

페더리 공 이후 등장한 구티 공은 페더리 공에 비해 가격이 20% 수준이었고 내구성이 좋아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골퍼들은 19세기 중반까지 페더리 공을 사용했다. 그러나 1848년에 ‘구티 공’이 개발되면서 페더리 공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구티 공은 구타페르카라는 구타나무의 수액을 재료로 만들어진 공이다. 구타페르카는 마치 고무 같은 재질이라서 열을 조금만 가하면 쉽게 동그란 모양으로 변형시킬 수 있었다.

구티 공 역시 처음에는 페더리 공보다 특별히 거리가 멀리 나간다거나 성과가 확연히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구티 공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 가격 때문이었다. 페더리 공은 일일이 손으로 꿰매는 작업이다 보니 하루에 공을 2~3개 정도밖에 만들 수 없었고, 가격 역시 골프클럽에 버금갈 정도로 비쌌다. 구티 공은 제작 과정이 훨씬 간단했고 가격은 페더리 공에 비해 20% 수준이었다. 망가지는 일도 더 드물었고, 비를 맞아도 플레이가 가능했다.

그래도 구티 공을 받아들이지 않는 볼 메이커들도 있었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세인트 앤드류스의 앨런 로버트슨의 이야기였다. 로버트슨은 구티 공이 본인의 골프공 사업을 위협한다고 생각해 구티 공을 골프공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로버트슨은 이후 디오픈에서 4번이나 우승하는 ‘올드 톰 모리스’를 도제로 두고 있었는데, 톰 모리스가 구티 공으로 골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즉시 모리스를 해고해버렸다. 구티 공은 처음에는 표면이 평평했지만, 공이 까지고 상처가 날수록 오히려 공이 멀리 나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구티 공 제작자들은 골프공 표면에 자국이나 패턴을 남겨서 판매하기 시작하며 딤플이 개발되기에 이르렀다.

고무공 시초 된 하스켈 공

1898년 미국 오하이오에서 살았던 코번 하스켈은 구티 공의 뒤를 이을 골프공을 발명했다. 하스켈은 지인과 함께 라운드를 하기 위해 지인이 일하는 고무공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지인을 기다리면서 공장에 있는 고무실을 동그랗게 말아서 바닥에 던졌는데, 고무 뭉치가 천장까지 튕겨 올라오는 것을 보고 고무 골프공을 떠올렸다.

하스켈은 1901년에 특허를 얻고 회사를 차린 후 일명 ‘하스켈 공’을 대량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스켈 공은 작은 고무심을 얇은 고무실로 감은 후 구타페르카로 표면을 만든 공이었다. 겉에서 보면 구티 공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지만, 구티 공보다 20야드가 더 나가고 샷 실수도 완화해 골퍼들의 선택을 받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하스켈 공이 골프를 너무 쉽게 만든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1902년 디오픈과 US오픈 모두 우승자가 하스켈 공을 사용하면서 이후 웬만한 모든 골퍼들은 하스켈 공을 맹신하게 되었다.

메이저 7승을 거둔 골프 슈퍼스타 해리 바든이 하스켈 공을 “초보자들이나 사용하는 공”이라며 열심히 비판했는데, 이 뒤에는 숨은 이유가 있었다. 1890년대부터 스팔딩은 구티 공을 대량 생산하며 골프공 판매가 회사 수익의 중심이 되었다. 1901년에 스팔딩은 바든과 협력해서 ‘바든 플라이어’라는 골프공을 야심차게 내놓았지만, 골퍼들의 관심은 이미 하스켈 공에 쏠려 있었다.

하스켈의 특허 때문에 스팔딩은 순식간에 구식이 되어버린 구티 공만 계속 제작할 수밖에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1917년에 하스켈이 스팔딩에게 회사와 특허를 모두 판매하고 은퇴하면서 스팔딩은 다시 골프공 시장의 최고 자리에 우뚝 서게 되었다.

딤플의 개발과 투피스 공의 인기

1908년 영국의 윌리엄 테일러라는 사람은 지금의 공들과 비슷한 딤플 디자인을 개발했다. 1970년대까지 모든 골프공들은 똑같은 ‘테일러 딤플’을 사용했다. 표면 소재를 구타페르카에서 ‘발라타’라는 또 다른 나무의 수액으로 바꾼 것 외에는 사실상 1960년대까지 골프공은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1968년에 스팔딩은 ‘이그제큐티브 볼’을 소개하며 골프공의 새로운 영역을 펼쳤다. 이그제큐티브는 최초의 투피스 공이었다. 고무실을 사용하는 하스켈 공과 달리, 스팔딩이 개발한 ‘솔리드 코어 공’은 고무를 고체로 만들어서 공의 속을 완벽히 채운 형태였다. 이그제큐티브는 기존의 하스켈 공과는 비교가 안 될 비거리를 자랑했고, 아마추어 골퍼들의 많은 선택을 받았다. 그래도 프로 선수들이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투피스 공은 섬세한 샷감이나 스핀이 부족해서 대회에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컸다.

그리고 타이틀리스트가 2000년 10월에 프로 V1 공을 선수들에게 공개하자 첫 번째 주에만 47명의 선수가 프로 V1으로 옮겨갔다. 필 미켈슨은 “프로 V1을 쓰지 않으면 무조건 다른 선수들보다 불리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고 주장했다. 결국 2001년 마스터스에서는 단 4명의 선수만 하스켈 공을 쓰는 상황이 됐고, 이후 하스켈 공은 골프공 개발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추었다.(jtbc, 2018sus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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