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공병 장교 동생 허장환씨 6·25전쟁 앞두고 증언,    "당시 주검은 너무 많고 날씨가 더워져 수장을 선택"
"정부가 나서 중국군 유해 발굴해 본국으로 보내줘야",  유해 숫자가 많은데다 국군 우선 발굴 원칙이 걸림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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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장환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가 한·미 연합군이 중장비를 이용해 중국군 포로를 밀어넣었다는
 장소에 서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파로호 전투는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유명하다. 1951년 5월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한·미 연합군이 중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2만4141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처럼 연합군과 중국군이 파로호에서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이유는 화천수력발전소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남한은 화천댐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고, 같은 이유로 북한으로서도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한·미 연합군은 전투가 끝나고 여기저기 흩어진 중국군 주검을 처리하는 일로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6사단 공병장교(당시 중위)로 전투에 참여했던 고 허장원씨는 그의 동생 장환씨에게 생지옥이나 다름없는 파로호 주변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했다. 허장환씨는 “당시 주검은 너무나 많았고, 날씨는 더워지고 있었다. 주검을 가장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이 파로호 수장이었던 것 같다. 형은 모든 전투가 끝난 뒤 한·미 연합군이 파로호 일대의 산과 들에 흩어진 중국군 주검을 불도저 등 중장비로 파로호에 밀어넣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화천 파로호 전투가 끝난 뒤 포로로 잡힌 중국군의 모습. 화천군청 제공

당시 파로호 전투 상황에 대해 화천군이 발간한 <화천군지>에도 “퇴각하는 적을 협공, 대부분의 적이 화천저수지(현 파로호)에 수장당했다. 저수지 주변과 계곡 일대는 적의 주검으로 뒤덮였다. 우리 후속 부대는 불도저로 주검을 밀어내면서 전진해야 했다. 중공군 도살장이었다”고 기록해놓았다.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 중국군의 주검을 일부러 파로호에 수장한 것이 사실이라면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제네바협약 17조는 ‘사망한 적을 그의 종교 관례에 따라 매장하고 유해의 송환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01년에는 화천군이 나서 정부에 파로호 중국군 유해 발굴과 위령탑 건립을 건의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지역 주민들은 대외적으로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이 적군 전사자를 집단으로 수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부가 미국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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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 파로호 인근에 있는 파로호 비 모습.

중국군 유해 발굴을 위해선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국방부는 2007년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하고 유해 발굴 사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해발굴감식단이 한 곳에서 발굴한 유해는 최대 70여구다. 이제까지의 사업에 견주면 파로호의 중국군 유해 발굴 사업은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6·25 전사자 유해의 발굴 등에 관한 법률’은 전사자 가운데 국군을 우선 발굴하게 돼 있다. 유해발굴감식단 관계자도 “국군 유해를 찾다가 중국군 유해를 발굴해 중국으로 송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중국군 유해를 찾기 위해 따로 발굴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50m에 이르는 파로호 수심과, 수문을 모두 열어 물을 모두 빼야 한다는 점도 어려운 점이다. 각종 수해와 방류 등 영향으로 중국군 주검들은 화천댐 수문이 가까운 곳에 몰려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발굴을 위해 파로호의 물을 모두 빼면 파로호에서 어업을 하는 어민들이 반발할 수 있다. 또 파로호에 중국군 주검이 2만구 이상 수장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 지역 어민 등 주민들에겐 달가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허장환 한중국제우호연락평화촉진회 공동대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번에 중국군 유해를 발굴해서 이 문제를 깨끗이 털어버리는 것이 낫다. 파로호는 팔당호의 상류 가운데 하나인데, 2만명 이상의 중국군 유해가 가라앉아 있는 그 물을 수도권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사용한다면 기막힌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한겨레, 2018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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