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구마모토현 백제계 성인 기쿠치성 저수지에서 확인된 금동불상. 보주나 항아리, 그릇을 공손히 받든 이른바 봉지보주형 보살상이다. 오른쪽은 발굴품을 토대로 일본에서 제작된 복원품이다.|          

 

백제계 망명 관리의 지도 아래 축성된 성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보살입상과 백제 성씨인 ‘진씨(秦氏)’ 목간….

지난 2007년 일본 구마모토현(熊本縣) 북부의 야마가시(山鹿市) 기쿠치성(鞠智城) 북부 저수지에서 의미심장한 유물들이 발견됐다. 저수지 북쪽 1.5m 지하에서 발굴된 유물 중 손꼽히는 것이 바로 금동보살입상 1점과 ‘秦人忍□五斗’라는 글자가 새겨진 목간 1점이다. 그러나 한국학계에서 이 유물들과 관련된 연구는 없었고, 따라서 제대로 공개된 적도 없다,

11일 한성백제박물관 강당에서 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와 한성백제박물관 공동주최로 열리는 ‘기쿠치성이 전해주는 백제의 흔적’ 학술대회는 이 두 유물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논문들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발표되는 의미있는 자리이다. 먼저 기쿠치성을 20여년간 발굴한 구마모토현 문화재과 소속의 야노 유스케(矢野裕介)는 ‘고대산성 중 기쿠치성’ 논문에서 “기쿠치성 내부에서 출토된 백제계 금동보살입상은 기쿠치성이 백제 망명 관리의 지도 아래 축성됐음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밝혔다.

기쿠치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염려한 일본이 북규슈(北九州) 등의 지역에서 경비를 강화하려고 세운 성 중 하나이다. 663년 백제부흥군은 왜와 연합을 이뤄 나·당 연합군과 이른바 백강 전투를 벌였지만 대패하고 만다. 그러자 일본은 신라와 당나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됐고, 이에 대비하고자 쓰시마(對馬)와 아키(壹岐), 북규슈에 방어성을 쌓게 된다. 이 중 규슈 지방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기쿠치성은 나·당 연합군을 막기위한 방위망 중 최남단의 성이다. 이 성을 비롯한 북규슈 일대의 성들은 백제계 망명인들의 지도 아래 축성된 것이다.

 

야노 유스케는 “예컨대 ‘나가토성(長門城)과 오노성(大野城) 및 기성(椽城) 등의 축성은 달솔(백제 16관등 중 2등) 답본춘초와 달솔 억례복류 등 백제 망명 고위 관리가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설명했다. 야노는 “기쿠치성에서 출토된 고구려·백제계 수막새와 원형의 홈을 지닌 백제 계통의 초석 양식, 그리고 저수지에서 확인된 금동보살입상과 ‘진인(秦人)’ 명문으로 보아 이 성 역시 백제계 인물의 지도 아래 성이 축성된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야노는 “기쿠치성을 비롯한 방어성들은 백제 망명관리의 지도 아래 한반도의 최첨단 기술로 축성된 성”이라고 부연설명했다.

홍성화 건국대 교수(동아시아비교문화연구회장)는 ‘백제와 히고(肥後) 지역’ 발표문에서 기쿠치성 저수지에서 확인된 ‘진인인□오두(秦人忍□五斗)’ 명문 목간에 특히 주목했다. 진(秦)씨는 일본에서는 하타(秦)씨로 읽는다.

일본학자가 작성한 이른바 ‘조선식’ 산성의 지도. 북규슈와 대마도, 교토, 나라, 오사카 등에 집중되어 있다.|이장웅 학예사의 논문에서

 

<신찬성씨록>(815년 편찬된 일본 고대 씨족의 일람서)은 “하타(秦)씨는 진시황제의 3세손인 효무왕에서 나왔고…궁월군(弓月君)이라 칭하는 융통왕이 응신 14년(413년) 127개 현의 백성을 데리고 귀화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진시황’ 운운은 하타(진·秦)씨가 진(秦)과 같은 성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신찬성씨록>이 편찬된 후대에 그렇게 견강부회된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 14년조를 보면 추론이 가능하다. <일본서기>는 “413년 궁월군(弓月君)이 120개 현의 인부를 이끌고 백제로부터 귀화했다”고 했다. 따라서 일본의 하타(秦)씨는 진시황의 후예가 아니라 백제계 귀화인인 궁월군의 후예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홍교수는 일본의 성씨 중 하타(波多)씨도 백제계 성인 하타(秦)씨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 교수는 “백제 망명객이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기쿠치성에서 하타(秦)씨와 관련된 목간이 출토됨으로써 백제와의 관련성을 더욱 높여주었다”고 밝혔다.

백제계 망명객의 지도편달 아래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기쿠치성. 일본은 백제멸망후 나·당연합군의 남하를 두려워한 나머지 북규슈 등에 방어성들을 구축했다. 축성에는 수준높은 백제 망명객들의 지도가 뒷받침됐다.
         

이장웅 한성백제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기구치성 출토 불상과 백제불상’ 논문에서 ‘진인(秦人)’명 목간과 함께 발굴된 금동보살상에 주목하면서 “이 불상은 ‘백제계 금동보살입상’이 틀림없다”고 밝혔다.

불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무언가를 쥐고 있는 형태로 발굴됐다. 신체의 옆면은 S자형이다. 아래쪽에는 불상을 받침대에 꽂아 고정할 수 있도록 뾰족한 돌기가 붙어있다. 돌기를 포함한 전체높이는 12.7㎝ 정도이다. 일본학계에서도 이 불상은 백제 멸망 직후인 7세기 후반 제작된 백제계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거의 조명되지 않았다.

 

이장웅 학예사는 “이 불상은 백제계 봉지보주형 보살상”이라고 추정했다. ‘봉지보주형 보살상’은 보주(구슬)나 호(壺·항아리), 합(盒·그릇)을 가슴 앞에서 두 팔로 받들고 있는 보살상을 통칭한다. 이런 봉지보주형 보살상으로는 백제 땅인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서산 마애삼존불의 우협시 보살, 태안 마애삼존불의 본존 보살 등이 유명하다. 이장웅 학예사는 “1985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11사례의 봉지보살형 보살상 중 9례가 백제 땅에서 확인됐다”고 전했다. 이장웅 학예사는 또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창안된 봉지보주형 보살상이 당시 활발한 교류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로 전해졌으며, 이것이 백제 망명객들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말했다. 6세기 후반 백제풍을 모체로 한 일본 법륭사(호류지·法隆寺) 금동석가삼존불이 백제-왜 교류의 시발점이다.

봉지보주형 보살상이 유행하던 시기의 백제에서는 <법화경>에 근거한 관음보살의 복덕구제를 기대하는 신앙과 <청관음경>에 의거한 악병고액(惡病苦厄)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청래신앙이 유포되고 있었다. 보주는 세계를 밝게 비추며 온갖 병고를 없애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존재라 여겨졌다. 이장웅 학예사는 “보주는 특히 반야(般若·지혜)를 상징하는 성물로 복덕구제의 신이한 능력을 지녔으니 보주를 받든 보살상은 백제에서도 관음보살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홍성화 교수(동아시아 비교문화연구회장)는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백제계 기쿠치성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경향신문, 2019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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