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바닥을 똑바로 편다. 그 위에 엄지를 치켜든 오른손 주먹을 놓는다. 이 손동작은 수어(手語)로 존경과 자부심을 뜻한다. 방긋한 미소는 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수어로 존경을 표현한 사진이나 영상을 공유하는 ‘덕분에 챌린지’가 한창이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헌신하는 의료진을 응원하는 캠페인이다. 꼭 ‘#의료진 덕분에’라는 해시태그가 따라붙는다.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뒤 국내 수어 환경에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매일 진행하는 정부 브리핑에 수어통역사가 등장했다. 화면 오른쪽 아래 작은 동그라미 속에 머물던 통역사들이 발표자와 나란히 나온다. 코로나19가 수어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됐지만 과제가 산적해 있다. 청각장애인과 수어통역사들은 “또 다른 재난을 대비하는 매뉴얼, 수어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어통역사의 전면 등장은 끝이 아닌 시작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가운데)을 비롯한 직원들이 4월 22일 충북 오송 질병관리본부에서 코로나19 환자 진료 및 치료에 힘쓰는 의료인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덕분에 챌린지’에 참여하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


한국에는 몇 개 언어가 있나요

“한국은 한 개 언어 국가입니까, 아니면 두 개 언어 국가입니까?” 청각장애인 윤정기(54)씨가 수어로 말했다. “이렇게 퀴즈를 내면 다들 하나라고 하는데 실은 두 개 언어가 있어요. 한국어와 한국수어.”

수어는 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 2016년 시행된 한국수화언어법의 기본 이념은 ‘대한민국 농인(聾人)의 공용어’라는 것이다. 이 법은 “농인과 한국수어사용자는 한국수어 사용을 이유로 모든 생활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며 한국수어를 통하여 삶을 영위하고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다. 예전에는 수화라고 했지만 지금은 국어와 동등한 언어임을 강조해 수어라고 쓴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도 농인에게 모어는 수어다.

하지만 수어의 환경변화는 더뎠다. 재난방송에서 수어통역을 의무화한 것도 지난해 일이다. 장애인 단체가 지난해 4월 강원 고성 산불 보도가 장애인을 위한 정보 제공에 미흡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내고 난 뒤다. 정부는 지난해 12월부터 대국민 담화나 주요 정책, 재난 상황 발표 현장에 수어통역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국면에선 브리핑을 시작한 지 15일이 지난 2월 4일에야 처음 수어통역사가 등장했다. 이때도 장애인 단체가 진정을 낸 뒤였다. 방송사들은 발표자만 확대한 채 방송을 내보내 질타를 받기도 했다. 5월 1일 고성 산불 보도에서도 수어통역을 제공한 건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수어를 일상으로 끌어오기는 부족했다. 총선 개표방송에선 수어통역이 아예 제공되지 않았다. 또 한 번 인권위에 진정서가 접수됐다.

‘자막이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수어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외국어를 보면 한눈에 이해하기 힘들 듯 농인은 문자를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한글은 이들에게 제2외국어나 다름없다. 농통역사(청각장애를 가진 통역사)인 이목화씨는 “대다수 청각장애인은 문장이 길어지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마스크 요일제·긴급재난지원금 같은 경우도 문자로 된 안내문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문의가 많아 직접 가서 설명해주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주춤한 이 시기에 장애인을 위한 재난대응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가을 이후 찾아올지 모르는 코로나19 2차 유행에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역확산이 일어날 땐 감염 위험 때문에 수어통역사가 병원에 동행하기 어려웠다. 이제는 병원 통역이 가능한 인력을 확보하고 이들을 위한 보호장비를 갖춰야 한다. 온라인 수어 상담 체계도 확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전문 수어통역사’가 필요하다. 지금은 수어통역사들이 법원·병원·교육 등 전문통역이 필요한 곳곳에 구분없이 투입되고 있다. 하나뿐인 수어통역사 자격증 제도 세분화의 필요성도 거론된다. 수어통역사인 김철환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장애벽허물기)’ 활동가는 “전문성 있는 수어통역사를 육성하고 방역당국이 명단을 확보해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투입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전까진 상황이 너무 급해 시스템이 없었다고 해도 이제는 갖춰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수어는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청각장애인 7명과 장애벽허물기는 지난 4월 23일 또다시 국가인권위 앞에 섰다. KT의 ‘마음을 담다’ 캠페인 때문이다. 이 캠페인은 청각장애인에게 인공지능(AI) 음성 합성 기술로 목소리를 선물한다는 내용이다. 기술로 구현된 청각장애인의 목소리를 듣고 가족들이 감동하는 내용의 광고도 방영됐다. 장애벽허물기는 “농인 가족은 물론 비장애인들에게 수어에 부정적인 인식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수어로 생활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음성언어로 생활해야 정상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며 진정을 냈다. 장애인이 나오는 광고를 만들 때 부정적 인식을 담지 않도록 내부기준을 만들고, 목소리 찾기 광고 방영과 신청자 모집을 유보할 것을 요구했다.

진정인들은 농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궁금해하고 주변인 또한 목소리로 교감하고 싶을 수 있다는 데는 공감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회사의 캠페인은 차원이 다르다고 판단했다. 광고에서 수어소통 장면이 거의 없었던 점을 꼬집었다. “수어를 할 수 있는 가족도, 수어를 배우려는 태도도 안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주변 환경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어가 아닌 가상의 목소리만을 들려주려는 것은 수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며, 한국수화언어법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이목화씨도 공감했다. “어릴 때 못 듣는다고 친구들이 바보라 놀리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지금은 그 친구들을 만나면 ‘나만큼 수어 잘해?’라고 농담도 하면서 서로를 인정하려고 해요. 나이가 들면 청력이 떨어져 자연스럽게 장애인이 됩니다. 어르신 중에도 기본적인 수어를 배우는 분들이 많고요. 굳이 음성언어 중심으로 모든 걸 굴러가게 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수어가 당당합니다.”

수어 소통은 청각장애인에게 당연한 권리다. 그런데도 윤정기씨는 수어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요즘 상황에 고맙다고 했다. “방역당국이 수어소통 문제에 응해줘서 고맙습니다. 수어통역사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수어를 쓰는 사람도 편히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왼손등을 펴고 반듯이 편 오른손 옆면을 두 번 가져다 댔다. ‘고맙다’는 의미다.(경향신문, 2020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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