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속살은 원래 빨간색이 아니었다.jpg



요즘은 수입 과일이다 하우스 재배다 해서 사시사철 다양한 과일을 먹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제철 과일을 먹는 게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것 같다. 여름 과일이라면 열에 아홉은 수박을 떠올릴 것이다. 과일 대다수가 수분 함량이 높지만 수박은 92%나 되고 당분도 풍부하다. 여기에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이 들어있어 여름철 땀 흘리고 지쳤을 때 먹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수박은 보기에도 아름답다. 검은 줄무늬가 있는 짙은 녹색(수박색) 껍질에 이와 보색대비를 이루는 붉은 속살이 중간의 흰 속껍질을 완충지대로 해서 마주하고 있다. 잘라놓은 수박에서 이탈리아 국기(삼색기)가 떠오른다. 그런데 가끔 속살이 빨간 대신 노란 수박이 눈길을 끈다. 무슨 맛일까 궁금하긴 한데 선뜻 사고 싶지는 않아 아직 먹어보지는 못했다. 굳이 돌연변이 수박을 먹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속이 노란 수박이 속이 빨간 수박에 비해 자연에서 멀어진 변이체는 아니다. 실상은 그 반대일 수 있다. 게다가 수박 속살의 원래 색은 빨강도 노랑도 아니다. 야생 수박은 다 속이 하얗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속살이 빨간 수박은 인류가 수박을 작물화하면서 얻어낸 특성이라는 말이다.

지난해 11월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에는 수박 작물화 과정에서 속살 색을 비롯해 다양한 수박의 특성이 얻어진 과정을 게놈 해독 데이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논문이 실렸다. 당시 겨울을 눈앞에 두고 여름 과일에 대한 연구결과를 소개하기가 어색해 넘어갔는데 마침내 때가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제철 연구결과’를 다룬 논문을 소개해야 더 관심이 갈 테니까. 

수박 기원 관련 논란 정리

최근 속이 노란 수박이 눈길을 끌고 있다. 수박 과육의 색에는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최근 수년 사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들의 실체가 밝혀지고 있다. 위키피디아 제공


수박은 박과(科)에 속하는 식물로 넓게는 수박속(屬)에 속하는 일곱 종을 뜻하고 좁게는 우리가 먹는 한 종(Citrullus lanatus)을 가리킨다. 우리가 먹는 종은 ‘달콤한 수박(sweet watermelon)’이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박과에 속하면서 수박과 가까운 식물이 참외와 오이다. 이에 대해서는 식물학에 조예가 없는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의학에서도 음양에 따라 수박과 참외, 오이의 성격을 서늘함 또는 차가움으로 분류하고 있다.

사실 수박 게놈은 이미 2013년 중국 국립채소공학연구센터를 주축으로 한 다국적 연구팀이 전형적인 재배품종(97103)을 대상으로 해독해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한 바 있다. 염색체 11쌍(22개)으로 이뤄진 달콤한 수박 게놈은 약 4억2500만 염기 크기에 유전자가 2만3000여 개로 밝혀졌다. 크기는 사람 게놈의 7분의 1이지만 유전자 개수는 10%쯤 더 많다. 

그런데 6년 만에 역시 중국 국립채소공학연구센터가 주도한 공동 연구팀이 또 수박 게놈 해독을 같은 학술지에 발표한 것이다. 2013년 논문은 달콤한 수박 게놈을 해독해 ‘수박 참조 게놈’을 만들었음을 보고한 것이다. 2019년 논문에서는 수박속 7종을 아우르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414개 품종의 게놈을 해독해 달콤한 수박의 작물화 과정을 재구성했다. 

아프리카 곳곳에 수박속 식물 7종이 자생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작물화가 일어난 건 3종뿐이다. 달콤한 수박은 늦어도 40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 작물화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고대 이집트 벽화에도 수박이 그려져 있는데, 쟁반 위에 놓인 수박도 있어 지금처럼 과일로 먹은 것으로 보인다. 달콤한 수박은 7세기 무렵 인도에 이르렀고 10세기가 돼서야 중국에 소개됐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2세기 초 고려 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데, ‘양참외(西瓜)’라고 기술돼 있다. 

참고로 일상에서 과일과 채소는 애매한 개념으로 같은 박과 열매이지만 수박과 참외는 과일이지만 오이와 호박은 채소다. 생으로 먹어도 맛과 향으로 뛰어나 식후 디저트처럼 단독주연이 될 수 있는 게 과일 아닐까. 고대 이집트 사람들도 맛이 꽤 달콤한 수박을 먹었을 거라는 말이다.

서아프리카에서 작물화가 이뤄진 또 다른 수박인 에구시멜론(egusi melon. 학명 Citrullus mucosospermus)은 과육이 아니라 씨앗을 먹는다. 이곳 사람들은 호박씨나 에구시멜론씨를 갈아 죽을 끓여 먹는다. 에구시멜론의 단면을 보면 속이 허예 별맛이 없어 보인다. 논문에서는 에구시멜론 19품종의 게놈을 해독했는데, 4품종은 정말 싱거운 맛이다. 나머지는 맛이 써서 먹을 수도 없다.

북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시트론멜론(citron melon. 학명 Citrullus amarus)은 얼핏 우리가 먹는 수박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육을 그대로 먹지는 않고 잼이나 동물 사료, 수분 섭취용으로 쓴다. 최근까지 시트론멜론은 달콤한 수박과 같은 종의 한 아종(subspecies)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참고로 수박속 식물들은 종이 달라도 교배가 이뤄지기 때문에 분류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번에 시트론멜론 31개 품종의 게놈을 분석해 비교한 결과 독립된 종으로 분류하는 게 맞고 그나마 진화과정에서 에구시멜론보다도 더 먼저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달콤한 수박이 사람이라면 에구시멜론이 침팬지, 시트론멜론이 고릴라인 셈이다.

작물화가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4종 역시 모두 속살이 희고 맛이 쓰다. 결국 맛이 쓰지 않으면서 달고 예쁜 빨간색 속살까지 지닌 수박은 우리가 먹는 한 종뿐이다. 그런데 논문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먹는 수박에는 나머지 6종 가운데 에구시멜론과 쓴사과멜론(bitter apple melon. 학명 Citrullus colocynthis), 시트론멜론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치 현생인류의 게놈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피가 섞여 있는 것처럼.


지난해 11월 학술지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전형적인 수박(오른쪽 위 Citullus lanatus cultivar)은 오랜 작물화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네이처 유전학 제공


색이 선명할수록 더 단 이유

게놈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박속 식물의 종분화 과정을 역추적해보면 공통조상은 쓴사과멜론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크기가 참외만하고 맛이 쓴 열매가 열리는 덩굴식물이었다. 그런데 종분화가 일어나고 작물화가 진행되면서 오늘날 수박만한 크기의 시트론멜론이 나왔고 그보다는 크지 않지만 씨앗이 먹을 게 많은 에구시멜론이 나왔다. 

흥미롭게도 이집트 남쪽에 위치한 수단에 속이 하얀 야생 달콤한 수박이 자생하고 있고 논문에서도 두 계열의 게놈을 해독했다. 따라서 늦어도 4000년 전 수단이나 이집트 지역에서 이들 야생 수박을 대상으로 작물화가 시도됐을 것이다. 다만 논문의 그림에서는 에구시멜론에서 종분화가 일어나 우리가 먹는 수박이 나온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그만큼 에구시멜론과 달콤한 수박의 게놈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이 분석한 달콤한 수박은 345가지로, 이 가운데 각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재배돼 온 토종(landraces)이 87개이고 육종학자들이 만든 품종(cultivars)이 258개다. 게놈 비교 분석을 통해 모두 43곳에서 작물화와 관련된 변이를 찾았다. 먼저 단맛을 살펴보자.

각 종의 단맛을 보면 수박속의 조상과 가까울 것으로 보이는 쓴사과멜론은 평균 1.6브랙스에 불과하지만 에구시멜론은 평균 3.4브릭스로 두 배 이상 높아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쓰거나 싱거운 맛이다. 반면 달콤한 수박 토종은 평균 8.3브릭스이고 육종 품종은 평균 10.1브릭스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2번 염색체에 있는 당운반 유전자 TST2와 10번 염색체에 있는 자당(설탕)합성효소 유전자, 라피노스합성효소 유전자의 변이가 주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라피노스(raffinose)는 자당에 갈락토스가 붙어있는 삼당류도 단맛은 자당의 절반 수준이다.

달콤한 수박 겉껍질의 짙은 녹색과 선명한 보색대비를 이루는 붉은 속살의 탄생에는 4번 염색체에 있는 LCYB 유전자의 변이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박 과육의 색은 카로티노이드의 종류와 양에 따라 정해진다. LCYB는 붉은색을 띠는 카로티노이드 분자인 라이코펜을 주황색을 띠는 카로티노이드 분자인 베타카로틴으로 바꾸는 효소다. 속이 붉은 전형적인 달콤한 수박은 LCYB 유전자가 고장나 과육에 라이코펜이 축적된 결과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단맛에 관련된 2번 염색체에 있는 당운반 유전자 TST2가 과육 색에도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메커니즘은 밝히지 못했지만 이 유전자가 활성화되면 카로티노이드 생합성 경로도 동시에 활성화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속의 빨간색이 연한 수박이 덜 단 이유다. 수박 과육 색에는 이밖에도 많은 유전자가 관여하고 있지만, 주역인 두 유전자의 변이로 색의 변화를 재구성해보자.

먼저 속살이 흰 에구시멜론(또는 야생 달콤한 수박)에서 TST2 유전자 발현 조절 부위에 변이가 생겨 당운반 단백질이 많이 만들어져 과육의 단맛이 높아지면서 케로티노이드도 많이 만들어져 과육이 노란색에서 주황색을 띠게 됐을 것이다. 그 뒤 LCYB 유전자가 고장나면서 라이코펜이 축적돼 과육이 빨간 품종이 등장했다. 실제 달콤한 수박 재배 품종 가운데 속이 빨간색인 것들은 모두 LCYB 유전자가 변이형인 반면 노란색인 20가지와 주황색인 14가지 모두 기능을 하는 야생형인 것으로 밝혀졌다. 


쓴맛은 완전히 사라져

야생 수박의 속은 흰색이다. 야생종과 교배를 통해 얻은 속이 흰 수박(WfWfBB)과 속이 빨간 수박(wfwfbb)을 교배하면 1세대는 모두 속이 흰 수박(WfwfBb)이 나온다. 1세대끼리 교배해 얻은 2세대는 흰색(Wf---)과 노란색(wfwfB-), 빨간색(wfwfbb)이 12:3:1로 나온다. 이는 멘델의 유전 법칙을 따르는 것으로 두 가상 유전자(Wf와 B)가 상위성 효과(epistatic effect)로 상호작용한 결과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간접적으로 카로티노이드 생합성을 조절하는 TST2와 라이코펜을 베타카로틴으로 바꾸는 LCYB가 바로 이런 관계다. Andreo 제공



오이나 참외를 먹다 보면 가끔 꼭지 부근에서 굉장히 쓴맛이 느껴진다. 이는 오이과 식물이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분자인 쿠커비타신(cucurbitacin) 때문이다. 따라서 작물화 과정에서 쿠커비타신 생합성을 억제하는 쪽으로 선별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오이와 참외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말이다. 반면 수박을 먹다가 쓴맛을 느낀 적은 없을 것이다. 쿠커비타신 생합성 경로가 완전히 막혀있기 때문이다.

게놈 분석 결과 이런 변화는 에구시멜론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번에 분석한 16개 품종 가운데 12가지에서 쓴맛이 없었는데, 쿠커비타신 생합성 경로를 조절하는 Bt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달콤한 수박의 경우 전부 변이형 Bt 유전자였다. 작물화 초기 일찌감치 쓴맛이 없는 형질이 고정됐다는 말이다.

작물화 과정에서 열매가 커지고 방어물질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식물은 각종 병충해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수박도 예외는 아니어서 덩굴쪼김병(곰팡이), 흰가루병(곰팡이)이나 선충의 공격에 시달린다. 또 가뭄 같은 스트레스에도 취약하다.

육종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생 식물의 유전자를 도입하는 전략을 즐겨 쓴다. 달콤한 수박 역시 이 목적으로 쓴사과멜론이나 시트론멜론과 교잡을 한 흔적이 이번 게놈 분석을 통해 드러났다. 이들 종에서 여러 스트레스 저항 유전자들이 도입된 것이다.


3500년 전 이집트 사람들이 먹었던 수박

고대 이집트 벽화에는 수박이 등장해 인류가 늦어도 4000년 전에는 수박을 작물화해 과일로 먹었음을 시사한다. 실제 3500년 전 미라를 깔던 수박 잎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 수박과 비슷한 맛과 색을 지녔다는 결과가 나왔다. 뮌헨대 제공


한편 지난해 5월 생물학분야 학술논문 선공개사이트인 바이오아카이브인(bioRxiv)에는 3500년 전 이집트 미라가 들어있는 관에 깔았던 수박 잎의 게놈을 해독한 연구결과를 담은 독일 뮌헨대 연구자들의 논문이 공개됐다. 보통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면서 동시에 올리기 때문에 벌써 나왔어야 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직 통과가 안 된 것 같다. 

아무튼 내용은 꽤 흥미로운데 당시 사람들이 먹었던 수박의 맛과 색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놈 분석 결과 예상대로 이 수박 역시 Bt 유전자에 변이가 일어나 작동하지 않았다. 쓴맛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라이코펜을 베타카로틴으로 바꾸는 LCYB 유전자도 오늘날 달콤한 수박과 같은 변이형이었다. 당시 이미 속이 빨간 수박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익숙한, 속이 전반적으로 선명하게 빨간 수박이 등장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수백 년 전 화가들이 남긴 수박 그림들이 증거다. 예를 들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알베르트 엑호트의 작품인 ‘수박과 파인애플이 있는 정물’을 보면 수박 속껍질이 두껍고 속살의 붉은색이 연하고 균일하지 않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수박의 모습은 사실 최근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그동안 속이 노란 수박을 회피해온 필자가 속이 좁았던 것 같다.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 속이 노란 수박을 한번 맛봐야겠다.  


약 400년 전에도 수박의 속살은 지금만큼 선명한 붉은색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작품 ‘수박과 파인애플이 있는 정물’. 위키피디아 제공


※필자소개

강석기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8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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