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제국은 지금부터 약 500년 전에 번창한 문명이었으니 썩 오래전 문명이 아닌데도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이는 잉카 제국이 번성한 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남아메리카라는 지역적 특성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지 못한 잉카 제국의 내적 문제점과 아울러 에스파냐인들의 침략을 받아 쑥대밭이 되어 버린 남아메리카 문명의 운명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서양 중심의 세계관, 역사관 또한 남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멀리 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다.

에스파냐의 악명 높은 탐험가이자 남아메리카의 정복자인 피사로(Pizarro)가 잉카 제국을 점령한 것이 1533년이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잉카 문명은 지금의 페루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명인데, 특히 제국의 수도 꾸스꼬(Cuzco)는 안데스 산맥의 해발 3,400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꾸스꼬란 원주 인디언 언어로 ‘중앙’이란 의미다. 꾸스꼬는 잉카 제국의 수도였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그 지역의 중심부로서 여러 유적이 전해 오고 있다.

15세기 무렵 잉카 제국의 왕인 유판키(Yupanqui)는 수도 꾸스꼬를 나라의 정치·종교적 중심지로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무렵 잉카는 고작 꾸스꼬 계곡 주변만을 다스리고 있었다. 유판키는 우선 도시 전체가 보이는 곳에 요새를 공고히 하고 수로 건설과 주변 지역에 계단식 논을 만들어 주민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꾸스꼬 건설에 숨겨진 놀라움은 이 도시가 접합제 없이 순수하게 돌만으로 건물을 지었다는 데 있다. 그뿐인가? 급·배수 시스템과 함께 잉카 제국 전역을 통틀어 3만 km가 넘는 도로망이 건설되어 있었다. 잉카 제국이 산악 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철제 도구 없이 이 모든 건설 활동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만든다. 한편 이를 통해 제국의 내적 잠재력을 키운 잉카 제국은 이후 대외적인 정복 작업에 나서 수많은 작은 부족을 복속시키며 제국의 위용에 걸맞은 나라로 성장했다.

그러나 1530년대부터 시작된 에스파냐의 남아메리카 침략에서 잉카 제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잉카 제국의 수도 꾸스꼬의 위용이 남달랐던 만큼 침략의 마수 또한 남달랐다. 태양신을 모시던 신전 본당 내부에는 보석으로 아로새긴 두꺼운 금판이 있었고, 거기에는 사람의 모습을 한 태양신의 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 상은 아침이면 전면에 빛을 받아 주위의 보석에 반사되면서 무지하기 그지없는 유럽 약탈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밖에도 달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고 그곳에 은판에 조각된 달의 신상이 있었는데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제기()들이 오늘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1570년대에 들어 잉카 제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꾸스꼬는 잉카 제국의 상징처럼 수많은 유물과 유적을 간직한 채 존재했는데, 이러한 결과 오늘날에도 꾸스꼬라는 명칭은 신화처럼 존재했던 잉카 문명의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다. 꾸스꼬란 이름의 밴드로부터 잉카 문명 여행의 중심지인 꾸스꼬까지 꾸스꼬란 단어는 우리에게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영원히 잊히지 않을 말없는 문명의 한 자락을 전해 주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세상의 모든 지식, 2007. 6. 25., 김흥식)


사진은 모라이 계단식 논 - 우루밤바 계곡의 살리나스 염전(해발 3,000m) - 살리나스로 가는 길에서 양무리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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