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진도군 소재, 사적 제127호. 면적 약 20,000m2. 고려 원종(元宗) 때 배중손(裵仲孫)이 진도에 와서 1270∼1273년에 걸쳐 몽골에 항쟁할 때 근거지로 삼았다. 그러나 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여겨지며, 현재 남아 있는 성은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긴 것이 조선 세종 20년 정월이므로, 1438년 이후에 축성하였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따르면, 1214년부터 1259년에 걸쳐 왜구가 연해지방을 침범하여, 1350년(충정왕 2)에는 진도의 관아를 내륙지방으로 옮기고 백성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 교치생활(僑置生活)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진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록은 축성 시기가 1438년 이후임을 더욱 뒷받침한다. 특히 남도포 석성(石城)은 동쪽에 있는 금갑보(金甲堡)와 더불어 오른쪽으로 가는 바닷길의 요지이며, 동시에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목줄기에 해당되는 요새지이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1683년(숙종 9) 6월에는 수군진관(水軍鎭管)을 위도(蝟島)와 가리포(加里浦)에 둠으로써, 남도진(南桃鎭)은 가리포진관에 부속된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석성은 본래의 규모가 둘레 1,233척(尺), 높이 8척이 되었으며, 샘과 우물이 각각 1개씩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765년(영조 41)경에는 석축(石築) 둘레 1,040척, 높이 12척, 치첩(雉堞)이 43개소 있었다고 하며, 현재는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과 성터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