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는 일찍이 청구도 제작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도제작에 몰두하였다. 청구도에서 드러난 단점들을 극복하고 지도의 이용에서도 효율성을 높인 지도를 제작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결실로 나타난 것이 동여도라 할 수 있다. 현재 동여도제작과 관련된 기록은 신헌(申櫶, 1810∼1888)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의 전문에서 신헌과 김정호와의 관계, 동여도의 제작과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동방여도서(大東方輿圖序)[“신대장군집(申大將軍集)”금당초고(琴堂初篙)]
輿地(중국)에 지도가 있음은 오래되었다. 풍후가 지도를 받아 비로소 구주가 펼쳐졌고, 주례 대사도 이하 직방, 사서, 사험의 관직은 모두 지도로써 바름을 분별하고 사물을 이름 지었다. 소진과 감무 등은 지도에 의거해서 천하의 험이를 말했다. 소하는 입관할 때 먼저 도적을 거두었다. 등우와 마원도 모두 형승을 말했는데 지도가 빠질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도에 뜻을 두고 비변사와 규장각에 소장된 것, 오래된 집안에 좀먹다 남은 것들을 널리 수집하여 증정하고, 여러 본들을 서로 참고하고, 여러 책들에 근거하여 합쳐서 편집하였다. 이리하여 김백원에게 물어 그것을 맡겨 만들게 하였다. 가리켜 증명하고 입으로 전해주기를 수십 년이나 하여 비로소 한 부가 만들어졌는데 모두 23권이다. 분합이 마땅함을 따르고, 열람하기에도 심히 편리하다. 맥로와 선로가 명료하여 의혹의 여지가 없다. 명산․산록의 특치․병치․연치․첩치와 흐르는 하천과 시내의 회류․분류․병류․절류․군현․방리의 경계, 도리의 거리, 그리고 우역․진보․성루․창해․사찰․봉수․관해․영액 등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 분율로는 넓이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고, 준망으로는 원근의 실체를 바로잡을 수 있고, 도리로는 경유하는 곳의 수치를 정할 수 있다. 고하, 방사, 우직을 모두 여기서 살필 수 있다. 무릇 재상이 이것으로써 방역을 다스린다면 변방 요새의 이로움과 병폐로움, 군사를 배치하는 마땅함이 여기에 있다. 많은 관부에서 이것으로써 백성과 물산을 파악한다면 재부가 나오는 바와 군국의 자원이 되는 바가 여기에 있다. 방백, 수령, 민사에서 의지(사용) 한다면 강역이 서려 이루어진 것과 산택의 수특이 경상, 수천, 민정, 풍속과 더불어 여기에 있다. 사민의 왕래, 수륙의 험하고 평탄함, 빨리 피할 수 있는 사실이 여기에 있다. 이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자산이다. 손자가 말하기를, '산림의 험함과 하천의 형태를 모르면 행군할 수 없고, 향도를 쓰지 않는다면 지리를 얻을 수 없다'. 참으로 그 강령을 판단하고 조관을 알지 못하여 임시적인 행군의 향도에 믿음을 둔다면 적에게 우롱당하지 않음이 드물 것이다. 요해처를 분간하고 완급을 살피면 기정(기습과 정면공격)이 마음속에서 결정되고, 생사는 손바닥 위에서 변하게 된다. 지리가 있는 곳에 따라 권형(權衡)이 있다. 황제 순우는 성인이지만 오히려 역시 군사를 썼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평온하나 위기를 잊지 않으면 어지러움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세상을 다스리는 무인으로 평생 동안 이것에 고심 근근하였으니 나 역시 무엇에 뜻을 두겠는가?
서문에 의하면 신헌은 김백원(金百源)에게 맡겨 지도를 완성하였는데 김백원(金百源)은 바로 김정호이다. 신헌은 당대 고위 무관으로서 규장각, 비변사 등의 지도를 열람할 수 있었던 위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김정호도 이러한 자료를 접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헌은 수십 년이 걸려 지도 1부를 완성했는데 23규(糾)로 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로 본다면 신헌이 제작을 주관하여 만든 대동방여도는 목판본이 아닌 필사본이고 전체 23첩으로 이루어진 지도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규장각의 동여도도 23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문 내용과 일치한다. 또한 지도의 내용이나 형식이 목판본 대동여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단지 동여도가 대동여지도보다 5,548개의 지명을 더 수록하고 있는 정도이다.
대동여지도의 경우는 뚜렷한 간기(刊記)가 표기되어 있으나 동여도에는 없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동여도의 제13규 여백 란에 표기되어 있는 인릉(仁陵)의 위치가 헌릉우강(獻陵右岡)으로 되어 있는데, 인릉은 순조의 능으로 원래 교하현에 봉안하였다가 1857년(철종 7)에 헌릉 우측으로 천봉이 결정되어 그 해 10월에 천봉이 완료된 것으로 볼 때 1857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와 체제·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대동여지도를 판각하기 위해 제작한 선행지도로 평가되고 있다고 연구된다. 이러한 추론에 근거한다면 동여도는 1857년 이후이면서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1861년 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시기에 신헌이 유배를 떠났었기에 제작시기 추정에는 다소의 문제가 있다고 판단된다.
동여도는 양식적인 면에서 대동여지도와 거의 유사하다. 전국을 22층으로 나누어 첩으로 만들었고 각각의 첩은 접을 수 있게 한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의 양식을 띠고 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청구도보다 많은 지명을 수록하고 있다. 이는 각종의 사상(事象)을 부호로 표현하는 지도표(地圖標)의 개발로 가능한 것이었다.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은 18,740여개로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13,188개보다 훨씬 많다.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은 대동지지와 비교하여 볼 때 수용할 수 있는 지명들을 거의 망라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진보․읍치․역참․창고․목소․봉수․능침․진도 등의 시설물은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으며, 청구도에 없던 성곽의 유무를 확실하게 기호로 표시하였다.
이후 대동여지도의 제작에서는 지명을 별도로 다시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판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과정에서 전체 지명 중에서 5,550여개의 지명이 제외되었다. 제외된 지명은 방리명(坊里名) 1,500여개, 산지 지명 847여개, 하천 지명 565여개, 교통 관련 85여개, 군사 관련 10여개, 기타 1,650여개이다.
동여도에는 이처럼 많은 지명을 수록하기 위해 각종의 사상(事象)을 부호로 표현하는 지도표(地圖標)를 고안했는데 이는 대동여지도의 것과도 유사하다. 동여도에서는 12개 항목 26종의 기호가 사용되었는데 반해 대동여지도에서는 14개 항목 22종의 기호가 사용되었다. 대동여지도에서는 판각을 위해 부호를 보다 간략하게 했지만,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더욱 정교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현(州縣), 진보(鎭堡), 역도(驛道)가 동일한 원 형태의 기호를 사용하여 혼동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에 대동여지도의 지도표 에서는 진보(鎭堡)를 사각형, 역참(驛站)을 지름이 그려진 원의 모양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역참의 기호는 종래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김정호의 독특한 고안으로 평가된다.
지도에 부호를 도입하여 사상(事象)을 표현하는 방식은 좁은 지면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인데 서구에서도 지도학의 발달과 더불어 다양한 부호가 개발되기도 했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경우 1500년대 제작된 광여도(廣輿圖)에서 이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부호의 사용이 전도와 같은 지도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목군현(府牧郡縣)이나 진보(鎭堡) 등의 구별에 사용된 정도이고 보다 정형화된 형태는 정상기의 동국지도에서 볼 수 있다. 동국지도에서는 비록 형식화된 표(標)의 형태로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범례(凡例) 속에 문장의 형태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지도표(地圖標)라는 기호화된 범례(legend)의 형태는 김정호의 지도에 이르러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도표의 개발 이외에도 동여도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점은 지형의 표현이 이전 시기 지도보다 정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 청구도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산계와 수계를 통일적으로 고려하여 산계의 흐름을 연맥의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산줄기의 내거(來去)가 확연하게 파악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도로에 10리마다 표시를 함으로써 지역간의 거리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러한 방식 역시 중국의 지도에서도 보기 힘든 것으로 조선에서 독창적으로 창안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도 청구도와 달리 도엽을 새롭게 재구성했으며 제책을 보다 합리적으로 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청구도에 수록된 많은 지지와 관련된 내용은 대동지지와 같은 지지에 수록하고 동여도에서는 보다 지도적인 면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필사본 방안식 지도로 (그림 10)은 23첩 지도로 20첩 3열과 21첩 2열에 있는 지도이다.
20리 방안지도로 현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남도 남해군 지역이다. 주변의 작은 섬들에는 섬의 명칭과 둘레를 기록해 놓았다. 섬에는 유난히 봉산의 표시가 많고, 동천곶 목장과 금산곶 목장 두 곳이 표시되어 있다. 평산포영은 석성을 갖춘 큰 영으로 수군만호가 주재하였고, 미조항진도 석성을 갖춘 큰 진으로 수군첨절제사가 주재하였다. 그 외에도 폐진 및 페보로서 미조항고진, 상주포폐보, 우산소폐보 등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난포폐현과 평산폐현은 본래 신라 때 현이었으나 경덕왕 때 강등되어 남해현에 내속된 것이다. 녹두산, 망운산, 두음산, 금산, 소흘산, 송등산이 기록되고 도솔암은 금산 기슭에 위치한 암자이다. 상주포 폐진 앞에 보이는 門岩은 절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노도, 갈도, 조도, 정도, 죽도, 세존도, 마도, 조도, 석도, 사도 등의 섬이 기록된다.
군현의 치소는 노란색의 원, 도로는 붉은 색, 군현의 경계는 굵은 노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어 한 눈으로 식별하기가 쉽다. 창선도는 진주목의 월경지에 해당한다. 진주목에서 관리하는 목장이 있다. 이전의 지도에 나타나지 않던 목장표시가 4곳에 나타난다. 남해 바다의 섬과 해안에는 다른 지도와 달리 물고기와 소금의 산지 위치를 표시해 놓았다. 그리고 해안에는 선소, 미조항, 구미조항, 당포진 등의 성을 갖춘 진과 옛 폐보가 많이 분포하고 있다. 남해도 위쪽 끝에 勝捷碑가 있는데 1598년 노량해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다.
대동여지도의 큰 오류는 雪川의 위치가 지금의 상주면에 기록되어 있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은
갈포(乫浦) 고현(古縣) 고현(古縣) 관당(官堂) 관음포(觀音浦) 남해(南海) 녹(도)(鹿(島)) 녹두산(鹿頭山) 대포(大浦) 덕신(德新) 망운산(望雲山) 모답포(毛畓浦) 목장(牧場) 비자(榧子) 삼봉(三峯) 서(면)(西(面)) 소(도)(蘇(島)) 승첩비(勝捷碑) 염전포(鹽田浦) 우모(牛毛) 장(도)(長(島)) 적량(赤梁) 적량(赤梁) 조(창)(漕(倉)) 차산포(車山浦) 창선도(昌善島) 파천포(巴川浦) 현내(縣內) 호을포(湖乙浦) 흥선(興善) 갈(도)(葛(島)) 곡포(曲浦) 구정봉(九井峯) 금산(錦山) 난포(蘭浦) 남(면)(南(面)) 노(도)(櫓(島)) 도솔암(兜率庵) 두음포(豆音浦) 령상(嶺上) 마(도)(麻(島)) 목장(牧場) 목장(牧場) 문암(門巖) 미조항(彌助項) 미조항(彌助項) 봉산(封山) 봉산(封山) 봉산(封山) 사(도)(沙(島)) 삼동(三東) 상주포(尙州浦) 석(도)(石(島)) 설천(雪川) 성현(城峴) 세존(世尊) 소흘산(所屹山) 속천곶(涑川串)(동천곶을 잘못포기하여 속천곶으로 나타냄) 애(도)(艾(島)) 외(창)(外(倉)) 우현(牛峴) 원산(猿山) 이동(二東) 정(도)(鼎(島)) 조(도)(鳥(島)) 조(도)(槽(島)) 죽(도)(竹(島)) 죽(도)(竹(島)) 평산(平山) 평산포(評山浦) 호(도)(虎(島) 등 71개 지명이다.
남해와 창선을 제외한 20개 섬(녹(도)(鹿(島)) 비자(榧子) 소(도)(蘇(島)) 우모(牛毛) 장(도)(長(島)) 조(창)(漕(倉)) 갈(도)(葛(島)) 노(도)(櫓(島)) 마(도)(麻(島)) 문암(門巖) 사(도)(沙(島)) 석(도)(石(島)) 세존(世尊) 애(도)(艾(島)) 정(도)(鼎(島)) 조(도)(鳥(島)) 조(도)(槽(島)) 죽(도)(竹(島)) 죽(도)(竹(島)) 호(도)(虎(島))이 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