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28 07:36

靑邱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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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축적된 지도학적 성과를 토대로 김정호는 여지학(輿地學)에 몰두하여 지도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최초 성과가 청구도이다. 청구도에는 최한기가 쓴 제문(題文)이 실려 있는데 1834년에 쓴 것이다. 따라서 청구도는 1834년 또는 그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정호는 지도(地圖)와 지지(地志)를 국가 경영의 근본 자료임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이것은 그의 지도제작 목적이 학문탐구나 개인적 취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치국(治國)과 관련한 현실적 필요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의식 하에서 그는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기존 지도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노력하였다.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기울인 그의 노력은 최한기의 청구도 제문(題文)과 김정호 자신의 청구도 범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와 관련한 내용들이다.
1) 친우 김정호는 소년시절부터 깊이 도지(圖志)에 뜻을 두고 오랫동안 자료를 찾아서 지도 만드는 모든 방법의 장단을 자세히 살피며, 매양 한가한 때엔 연구 토론하여 간편한 비람식(比覽式)을 구해 얻어 줄을 그어 그렸으나, 물을 자르고 산을 끊고 모든 고을을 흩어 놓았으니 진실로 표(表)에 의하여 경계를 알기가 어려움을 어찌할 수 없었다.(위 두 구절은 종래 지도의 폐단을 밝힌 것이다. 한 장에 리수(里數)에 따라 종횡으로 정간(井間)을 긋고 폭에 그려서 작은 고을은 넓어졌고 큰 고을은 도리어 축소되었으니, 표(表)에 따라 경계선의 살핌에 있어서는 촌(寸)을 맞추어 척(尺)을 헤아림과 다름이 없으므로 항상 문란한 점이 많았다).(靑邱圖題)
2) 이에 전폭을 구역에 따라 재단하여 우(禹)의 정전(井田)을 그린 것을 본받아서 가장자리에 선(線)을 긋고 당시의 표력산(表曆算)에 의거하여 한쪽은 위로 한쪽은 아래로 하여 넓고 둥근 형세는 옛 강역에 접하게 하고 반은 푸른 것으로 반은 붉은 것으로 하여 수(繡)처럼 얽힌 강산을 연색(連色)으로 하여 동서남북의 평탄하고 험준함을 대략 가렸으매(靑邱圖題)
3) 정조 때 모든 주군에 명하여 그 지방을 도형하여 올리게 하니, 이에 경위선표가 있어 혹은 팔도로 분폭하고 혹은 주현으로 나누어서 임의로 판단하여 만들었는데, 정철조, 황엽, 윤영의 것이 가장 드러났다.(靑邱圖凡例)
4) 대개 종이의 크기에 한정이 있어서 도본 전폭 안에는 방면(坊面)과 분계선을 다 넣기 어려운 즉 그 자세함을 다할 수가 없다. 주군의 각본은 그 지역의 넓고 좁고 길고 짧은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한 판(版) 안에 배포하자니, 경위선에 있어서 자연히 성기고 빽빽한 구분이 생기고 그 경계를 살핌에 있어서는 표를 찾기 어려운 즉 관규의 폐단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폭의 전도를 가지고 층판으로 국정하여 고기비늘처럼 줄지어 잇달아 책을 만들었으니, 그의 두 가지 결점이 없게 되어 지지에 실린 바와 옛사람들이 만든 도본도 또한 이것을 가지고 상고할 수 있다.(靑邱圖凡例) 
 최한기가 서술한 1)의 청구도제에 의하면 김정호는 어렸을 적부터 지도제작에 뜻을 두고 많은 지도를 접하면서 제작방법을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호가 당시 주로 참고했던 지도들은 경위선표가 그려진 방격식 지도였다. 3)에서처럼 경위선표의 지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경위선이 그려진 군현지도를 주로 열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경위선이 그려진 군현지도책은 1), 4)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같은 규격의 한 장의 종이에 한 개의 군현을 그리다 보니 면적이 작은 군현은 경위선의 간격이 넓어지고 면적이 큰 군현은 간격이 좁아져 서로 잇대어 비교할 수 없고, 인덱스 지도를 통해 군현을 찾아 볼 수 없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동일한 간격의 방격을 사용하면 각 군현지도의 규격이 일치하지 않아 통일된 책자로 만들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김정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형의 전도를 기초로 다시 경위선표를 그려 이를 찾아보기 쉽게 책자의 형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김정호의 초기 작품인 청구도는 채색필사본으로 제작되었는데 현재 국내에 7∼8종이 전하고 있다. 청구도는 대개 건곤(乾坤) 두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 보통이나 규장각 소장본처럼 4권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지도는 범례(凡例), 지도식(地圖式), 본조팔도주현도총목(本朝八道州縣圖總目), 도성전도(都城全圖), 팔도주현도(八道州縣圖), 그리고 부록으로는 신라구주군현총도(新羅九州郡縣總圖), 고려양계지도(高麗兩界地圖), 본조팔도성경합도(本朝八道盛京合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경우는 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 사군삼한도(四郡三韓圖), 삼국전도(三國全圖)등의 지도와 부록으로 군국총목표(軍國總目標)가 덧붙여 수록되어 있다. 동방제국도․사군삼한도․삼국전도 등은 원래 수록하려던 지도였으나 역대 지지(地志)로 상고해 볼 때 제가(諸家)의 고증이 온당치 못한 것이 많아서 삭제해 버렸던 것이다 라고 김정호의 청구도범례에서 말하고 있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에 있는 이들 역사지도와 군국총목표(軍國總目標)는 추후에 수록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청구도는 전국을 가로 22판, 세로 29층으로 나누어 첩의 형식으로 만들었고, 1층에서 29층 가운데 홀수 층은 상권에, 짝수 층은 하권에 수록하였다. 1판 1단의 길이는 가로 70리, 세로100리에 해당하는데 이것으로 계산한 우리나라의 폭원은 동서 1,540리, 남북 2,900리가 된다. 즉, 동서 1,500여리, 남북 3,000여리가 되는 우리나라의 폭원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의 방격으로 나누어 각각의 층판을 지도의 한 면으로 삼아 그렸다. 그리고 지도의 각층을 위 아래로 이어 볼 수 있도록 홀수 층과 짝수 층을 서로 다른 책으로 분리하였다. 가로 70리, 세로 100리로 이루어진 도면에도 지도의 외곽으로 가로 7, 세로 10의 눈금을 그어 넣었다. 단지 지도상에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방격선을 제거했던 것이다. 이렇게 제거된 방격선까지 합하면 가로 154, 세로 290의 방격선이 우리나라 전체를 덮고 있는 셈이 된다.

                                 그림 청구도의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방격(方格)과 아울러 청구도의 양식상의 중요한 특징은 책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홀수 층과 짝수 층을 분리하여 2권의 책으로 만든 것인데 상하를 잇대어 볼 수 있게 배려하였다. 조선시대 제작된 지도들은 첩(帖)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첩은 수록되는 도면의 수량이 적을 때 가능한 것이고 도면의 수량이 많아지면 첩보다는 책으로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군현지도의 경우 대부분 책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러나 책으로 된 군현지도의 경우도 한 도면에 한 개의 군현이나 몇 개의 군현을 묶어 수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달리 청구도에서는 원하는 지도를 찾아보기 쉽도록 인덱스 지도를 맨 앞에 수록하고 각 층별로 지도를 수록하였다.
 청구도는 이전에 제작된 어떤 지도보다도 풍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은 지형(地形)·수계(水系)·성곽(城郭)·창고(倉庫)·역도(驛道)·봉수(烽燧)·진도(津渡)·교량·고개·도서·시장·호구·군병·제언·토산·인물·공납·풍속·사찰·능원·고적 등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청구도에 수록된 지명은 15,485개로 1861년 목판본 대동여지도가 13,188개의 지명을 수록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2,297개의 지명을 더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청구도가 목판본이 아닌 필사본으로 제작된 데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당시로는 가장 자세한 조선지도를 제작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김정호는 모든 지명을 일일이 다 수록하기보다는 지도의 기능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지명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수록하였다. 즉, 조그마한 물줄기와 산 이름, 마을 이름들을 모두 수록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에 산수의 형세와 군읍(郡邑)의 동서와 도리(道里)의 원근, 고개와 골짜기의 험이(險夷)를 살피는 데 유용한 지명들을 우선적으로 표시하였던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 다양한 내용을 수록하기 위해 청구도에서는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그에 입각하여 지명들을 표기하였다. 즉, 청구도에서는 대동여지도에서처럼 지형지물의 기호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만으로 그 위치를 파악하게 하는 적절한 방법을 개발하였다. 진보(鎭堡), 사원(祠院), 역창(驛倉) 등의 경우 우선 소재 위치에 진(鎭), 보(堡), 사(祠), 원(院), 역(驛), 창(倉)의 글자를 먼저 써서 그 글자가 표기된 곳을 소재 위치로 하고 모(某)에 해당하는 이름은 형편에 따라 가로 혹은 세로로 표기하여 그 위치를 알게 하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따라서 지도를 다시 전사(轉寫)할 때는 이점을 특히 유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 표기의 방법은 김정호가 독창적으로 고안한 것으로 보이며 이전 시기 지도에서는 볼 수 없는 방법이다. 이전 시기 지도들이 제한된 지면에 여러 글자로 된 지명을 기입하다 보니 위치의 정확성을 기하기 어려운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방면(坊面) 호칭의 경우 지역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는데 당시 가장 널리 불리던 것으로 통일하여 표기하였다. 이전 시기 지도에서는 저본(底本)이 되는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청구도에서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행정지명을 수록하려는 노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구도의 내용과 관련하여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순수한 지도이기보다는 지지(地誌)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도에 표시된 각 군현의 중심에는 호구(戶口)․전결(田結)․곡총(穀總)․군정(軍丁)․도리(道里)를 수록하였다. 이러한 자료는 해당 고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이점이 있으나 지도가 다소 번잡해지는 단점도 있다. 이들 자료 중에서 도리(道里) 자료에 관한 것은  김정호 자신의 지리 자료 외에 동국여지승람과 문헌비고를 주로 참고했다. 두 문헌의 기사 내용이 서로 다른 경우는 문헌을 따르지 않고 기본도의 표기대로 하고 다음에 상고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도 했다. 자료 선택의 기준을 분명히 밝힌 점은 이전 지도와 다른 점으로 볼 수 있다.
 청구도에서 다양한 내용들을 표현하는 방식은 현존하는 사본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범례에서는 이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자연지형에서 산지의 경우 물이 분리된 사이로 산줄기가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산을 모두 연결시켜 그린다면 오히려 번잡스러울까봐 유명한 산 서너 봉우리만 그려 넣었다. 그러나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본들은 봉우리를 이어 연결시킨 형태로 지형을 표현하였다. 규장각 소장의 청구요람 정도가 이러한 원칙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동여도, 대동여지도의 지형 표현 방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김정호는 수계(水系)를 보면 산계(山系)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지도상의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중요한 산들만 독립적으로 그렸다. 그러나 문제는 지도를 읽는 독자들이었다. 당시 지도를 읽는 독자들은 김정호와 같은 지리적 식견을 지닌 사람들은 아니었다. 따라서 띄엄띄엄 그려진 산들로부터 연결 관계를 온전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후대의 청구도 사본들은 봉우리를 연결시켜 연속된 산줄기의 형태로 산지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이후 동여도나 대동여지도에서는 조선 지도학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산줄기 중심의 산지 표현법을 좀더 완결된 형태로 개발하였던 것이다. 
인공 지물의 표현에서는 동여도나 대동여지도에서처럼 기호(記號)가 고안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지명과 함께 건물의 모양이나 인공물의 형상을 같이 그려 넣었다. 도로망의 경우도 대동여지도와는 달리 직선이 아닌 곡선의 형태로 본래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 외에도 군현의 경계가 뚜렷하게 그려져 있으며, 당시까지 남아 있던 월경지의 모습도 소속 군현, 면명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청구도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표현적 특성은 그림 4-2의 지도식(地圖式)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림 청구도 범례의 지도식



필사본 방안식 지도로 1책, 2책, 3책, 4책 중 (그림)은 3책 23층 11판, 4책 24층 10, 11판이다.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 남해도는 경상도 남해현으로 지도 오른쪽에 보이는 창선도는 진주의 월경지였고, 현재의 남해군 창선면으로서 원래 고려시대까지는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있는 진주의 속현이었다. 고려말과 조선초를 거치면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해안선과 섬 및 지명은 조선지도를 비롯하여 같은 계통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해동여지도, 大阪府立圖書館 소장의 조선도와 거의 동일하다.

해동여지도에는 각 군현 지도의 20리 방안의 위선과 경선에 일정한 번호가 붙어 있어 서로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진주지도에 창선도는 위선 114와 116 사이에, 경선 34와 36 사이에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봐도 본 지도가 해동여지도 계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명이라는 차원에서 본 지도에는 조선지도, 해동여지도, 조선도와 비교할 때 잘못된 것도 있다. 청구요람에도 본 지도처럼 되어 있어 후대의 필사자가 아니라 본 지도의 제작자 자체가 잘못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서는 앞의 3개 지도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남해현의 읍치는 현재의 남해군 남해읍 남변리, 서변리, 북변리에 있었다.

남해도의 모습은 실제에 비해 남북보다 동서가 길게 되어 있고, 특히 외창 동쪽 지역의 모습이 실제보다 훨씬 길게 그려져 있다. 이런 모습은 앞의 3개 지도에서 시작하여 본 지도를 거쳐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상호 영향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남해도 주변의 섬은 앞의 3개 지도에는 거의 표시되어 있지 않다. 본 지도는 앞의 3개 지도 계통이면서 섬 지역을 더 자세하게 그린 지도를 참고했거나 본 지도의 제작자가 추가했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고 판단된다. 외창 동쪽 지역이 실제의 남북보다 동서가 길게 그려진 것은 이 지역이 높은 산악지역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전통시대에는 산악지역을 넘어가면서 거리를 측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측정된 거리를 평면상의 지도에 그대로 반영하면 실제보다 훨씬 길게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해도 왼쪽 아래에 표시된 平山浦鎭에는 정4품의 만호가 파견되어 있었고, 현재의 남해군 남면 당항리 일대에 있었다. 평산포진이 있었던 곳은 현재 앵강만이라고 하여 남쪽으로 남해에 연결되도록 되어 있다. 본 지도에는 이 앵강만이 서쪽으로 열려있는 형태로 그려져 있어 실제와 상당히 다르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은
갈(葛) 고현면(古縣面) 노량진(露梁津) 녹두산(鹿頭山) 덕신역(德新驛) 우모(牛毛) 충렬사(忠烈祠) 대방산(臺方山) 목소(牧所) 미조(彌助) 미조항(彌助項) 애(艾) 적량(赤梁) 적량면(赤梁面) 조(鳥) 창선도면(昌善島面) 호(虎) 고성(古城) 관당(官堂) 금산(錦山) 난포(蘭浦) 남면(南面) 남해(南海) 노(櫓) 녹(鹿) 녹두산(鹿頭山) 동천관(凍川串) 마(麻) 망운산(望雲山) 문암(門巖) 비자(榧子) 사(沙) 삼동면(三東面) 삼봉(三峯) 서면(西面) 석(石) 성현(城峴) 세존(世尊) 소(蘇) 소을산(所乙山)(흘이 아닌 을로 표기) 외창(外倉) 우현(牛峴) 원산(猿山) 이동면(二東面) 정(鼎) 조(槽) 죽(竹) 죽(竹) 지족진(只族津) 창(倉) 평산포(平山浦) 등 52개 지명이다.

 남해와 창선을 제외한 18개 섬(갈(葛) 우모(牛毛) 애(艾) 조(鳥) 호(虎) 노(櫓) 녹(鹿) 마(麻) 문암(門巖) 비자(榧子) 사(沙) 석(石) 세존(世尊) 소(蘇) 정(鼎) 조(槽) 죽(竹) 죽(竹))이 표기된다.

Who's 임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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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옥 (Jongox Lim)


-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학과 학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과 석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학과 교육학박사. [지리교육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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