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은 왜 북한산에 '성(城)'을 쌓았나

by 지리임닷컴 posted Jan 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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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시대 최대의 국가 프로젝트.. 산성 둘레 약 13km
37년간의 축성 찬·반 논쟁.. '도성 수축' vs '산성 축성'
산성 품은 성곽 지대.. 도읍의 진산(鎭山) 북한산
북한성도 세부 관성소 [고양시]

북한산은 삼국시대 이래, 군사 요충지로서 수도 방어기지의 면모를 갖춘 도읍을 품은 산이다.

도성을 방어하고 왕실과 도성 안 백성을 지켜 줄 명실공히 도읍의 진산(鎭山)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왜 수십 년간 논쟁을 벌여 가면서까지 북한산에 산성을 쌓기로 결정한 것일까.

요약하자면 숙종 재위 당시 청나라 해역에 출몰한 대규모 해적 무리의 침입에 한양 도성이 늘 위험에 노출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1637년,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재위: 1623~1649)가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봉림대군(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굴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짐작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끊임없는 북핵 위협이 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기록에 의하면 북한산성 축성은 단순히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외세로부터 왕실과 조정(朝廷), 도성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숙종은 북한산성 축성이 외세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대비책의 하나라고 마음속 깊이 굳혔다.

그는 당시 강화도와 남한산성은 유사시 오래 머물지 못하는 곳인데 비해 북한산성은 이동이 쉽고, 산세가 험준해 적의 접근이 어려우니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천연의 요새로 판단했다.

사실 북한산성 축성 계획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재위: 1567~1608) 때도 제기된 바 있다. 의주로 피난했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한양으로 돌아온 뒤 전란 시 방비책으로 북한산에 산성을 쌓자는 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축성의 장·단점을 논의했지만, 당시 국방 요충지 여러 곳에서 보수 중이던 성곽 공사를 끝내지 못하는 실정에다 재정과 인력마저 부족한 상태여서 선조 대의 축성은 더는 진척하지 못했다.

이후 효종(재위: 1649~1659) 때도 국방강화책으로 북한산성 축성이 제기됐다. 굴욕적인 볼모 생활을 겪은 효종은 북벌 정책을 추진했으나, 역시 재정난과 집권층의 반대에 부딪혀 북한산성 축성 계획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북한산성 축성은 현종(재위: 1659~1674) 대를 지나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 무렵 중국대륙의 정세가 조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데다 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컸다.

그래서 북한산성 축성이 제기됐던 것이다.

북한산성 성곽과 시설물 [고양시]

■ 북한산성 '축성 논쟁'

숙종과 조정 대신(大臣)들은 북한산성 축성을 두고 연일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론화했다.

축성 논쟁의 발단은 청나라 해역에 출몰한 해적 떼가 조선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부터다.

강화도와 인천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경비를 강화하고 조총과 화약, 산성 전투용 수레 등 무기 확보에 총력을 쏟았다.

지역별 방어 전략과 효율적인 군사 운용 안까지 제시됐는데 그중 하나가 북한산성 축성이었다.

조정에서는 조속히 북한산성을 쌓자는 의견과 축성보다는 도성 방비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판부사(判府事) 이유(李濡)가 상소(上疏)했다. "북한산에 성을 쌓는다면 내성(內城)을 조성해 (유사시) 종묘와 사직을 옮길 수 있습니다. 또한 인근 조지서(造紙署: 조선시대 종이 제조를 관할하던 관청) 어귀를 막아 한강 변의 세곡(稅穀) 창고를 옮겨 설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공사(公私)의 비축 물량을 모두 옮겨 들여갈 수 있습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0월 26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지완이 의견을 제시했다. "의논하는 자들은 북한산에 성을 쌓는 것이 도성을 보전하고 지키는 바탕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성을 지키려면 북한산에 성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 북한산에 성을 쌓는다면 도성은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1월 10일

또 다른 절충안도 나왔다. ‘도읍 지역의 축성과 수성(守成) 방안을 서두를 필요 없으며, 군사 조련과 요충지역 방비가 우선’이라는 의견과 ‘도성 정비와 함께 북한산성을 새로 쌓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결정은 쉽지 않았다.

진사(進士) 허극이 상소해 도성 수축을 청했다. 이에 숙종이 "(도성은) 넓고 큰데다가 견고하지 못한 결점이 있어 그곳에서 지키고자 한다면 위태로울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밤낮으로 (성 쌓을 곳을) 생각하고 있다. 여러 신하들과 논의해 특별한 곳을 정하면 백성과 함께 들어가 지킬 것이다."라고 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0월 20일

시간이 흐를수록 해적 침입의 가능성을 낮았지만, 해적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을 보완한다는 구실로 성을 쌓는다면 청나라의 간섭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게 숙종의 생각이다. 성을 쌓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637년,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병자호란)에 패한 뒤 강화를 맺으면서 “성곽 수축과 축성을 금한다”는 규약을 맺은 바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성 축성 반대파는 도성 주민 대부분이 도성 지키기를 원하며, 10만 명의 장정이 구역을 나눠 성곽을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도성을 근거로 삼아 군량미와 무기 보급을 하는 게 더 유리하며, 도성을 버리면 종묘과 사직도 옮겨야 하는 굴욕을 또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산성 관성소지 및 상창지 배치도 [고양시]

숙종이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내린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때는 북한산 지형의 단점으로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제기됐다.

북한산 성곽 공사로 도읍인 한양의 지맥(地脈)이 손상되며, 청나라와의 조약을 어겨 외교관계 악화를 부르고, 남한산성과 강화성을 소홀히 하게 돼 수도권 방어에 허점이 노출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밖에 굶주린 백성이 많고 도적이 횡행하는 시기에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야 하는 축성 공사는 무리라는 의견도 나왔다.

반면, 북한산성 축성 찬성파는 국가 위기 시 도성을 방어하기에는 도성이 너무 넓기 때문에 북한산성을 축성하면 도성 백성이 함께 들어가 지키기에도 용이하며, 기존의 남한산성은 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다.

축성에 쌀 1만석과 면포 1천 동(同), 역군(役軍) 1만 여 명이면 2~3개월 안에 공사를 마칠 수 있다며 축성 방안을 제시했다.

중앙의 군사를 교대로 투입하고 빈민을 축성인력으로 동원하는 인력 활용 방안까지 내놨다. 특히 남한산성과 강화성은 병자호란 때 함락된 전례가 있어 새로운 보장 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축성 논쟁은 해적 침입 방어보다는 국가 전란 시 방비책으로 무게가 실리고 있었다.

부응교(副應敎) 이세최가 숙종에 아뢰길 "만약 북한산에 성을 쌓고 겸해서 도성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좋으나, 북한산성을 쌓은 뒤에 도성을 지킬 수 없다면 이는 적절한 계책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숙종은 "북한산성을 쌓자는 지금의 의논이 청나라에서 해적을 주의하라는 문서가 전달된 뒤에 나왔기 때문에 이 축성 안을 이들 해적을 막으려는 계책으로 여기는데, 나의 뜻은 천혜의 지세를 이용한 성을 쌓아 장래의 구원(久遠)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숙종실록』 숙종 36년(1710년) 12월 1일

숙종은 임진왜란 때 조정이 의주로 피난해야 했던 사실에 주목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군수품과 물자를 비축해 전란 때 도성 백성들이 함께 들어가 항전 지로 삼겠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산은 산세가 험해 지형지물을 이용하면 축성에도 공력이 덜 들 것으로 판단했다.

전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머물만한 장소가 있어 북한산성이 왕실의 안녕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며, 도성 백성들의 안전을 담보하는 요새로 여겼다.

축성 논쟁 한 때 도성 수축론에 힘이 실려 실제 공사를 수년에 걸쳐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인력 동원의 어려움으로 여러 차례 공사가 중단되면서 도성 수축은 마무리도 못한 채 사실상 실패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숙종 즉위년인 1674년에 처음 북한산성 축성 제안이 나온 이후 세 번 씩의 축성 논쟁 끝에 1711년 2월, 숙종은 마침내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했다.

"그러나 사람의 소견은 사람의 얼굴이 같지 않음과 같아서 만일 여러 의논이 반드시 합치되기를 기다려 일을 일으키려 한다면 성취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는 이른바 ‘너희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자면 적은 이미 강을 건너게 된다’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비변사등록』 숙종 37년(1711년) 2월 9일

대청터 현황(2020년 시굴조사) [고양시]

■ 37년간의 결실 '북한산성' 축성

숙종은 북한산성 축성을 결정하고 책임자를 임명해 구체적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축성은 훈련도감(訓鍊都監)·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 등 삼군문(三軍門)에서 구역을 나눠 맡기로 했다.

축성 기술자를 전국에 공모하고, 일반 역부는 도성 주민을 동원하기로 했다. 재원 마련은 삼군문에서 맡았지만, 비변사(備邊司)·호조(戶曹)·병조(兵曹)·진휼청(賑恤廳) 등 중앙기관에서도 지원하도록 했다.

성곽 공사는 1711년 4월에 시작해 그해 10월에 마무리했다. 산성 전체 둘레는 약 13km에 달했다.

성 내부 시설 공사를 거쳐 1714년에 내성(內城)에 해당하는 중성(重城) 축조를 마쳤다. 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성문(城門)을 설치했으며, 동서남북에 대문을 뒀다.

행궁(行宮)과 내전(內殿)과 업무공간인 외전(外殿)을 중심으로 모두 124칸이다. 비밀 출입구와 물을 외부로 내보내는 수문(水門), 병사들의 초소이자, 거처인 성랑(城廊) 143채를 지었다.

산성 관리를 맡은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산성 내 지휘부인 유영(留營) 3개소도 마련했다.

무기와 군량미, 관리용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倉庫) 8개와 우물(井) 99개소와 저수지(池) 26개소를 조성했다. 그 외 누각(樓閣) 3개, 다리(橋梁) 7개, 11개의 사찰 등이다.

이로써 북한산은 대규모 산성을 품은 성곽 지대로 거듭나게 됐다.

조선 개국 이래 300년이 흐른 뒤 도성을 방어하고 왕실과 도성 백성을 지켜줄 도읍의 진산(鎭山)으로 자리 잡았다.

참고·인용: 『성(城)과 왕국』, 조윤민, -주류성-

사진: 문화재청·경기도 박물관·고양시(아시아경제, 2022년 0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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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옥 (Jongox Lim)


-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학과 학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과 석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학과 교육학박사. [지리교육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