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시대 왕과 왕비, 왕자와 공주 등 왕족들은 용변을 볼 때 도자기로 된 ‘매화틀’(휴대용 변기)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하급관리와 내시·궁녀, 궁궐을 지키는 군인 등 궁궐에서 살았던 그 많은 사람은 어디서 배변 욕구를 해결했을까. 그 비밀을 풀어주는 ‘공중 화장실’ 유구가 경복궁 동궁 남쪽에서 발굴됐다. 조선 왕궁의 화장실 유구가 실물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8일 발굴 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경복궁의 화장실 존재는 ‘경복궁배치도’ ‘북궐도형’ ‘궁궐지’ 등 기록으로 나온다. 1∼2칸에서 4∼5칸짜리 등이 곳곳에 총 75.5칸이 있었다.

이번에 세자 거처인 동궁 근처에서 나온 화장실은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긴 직사각형 구덩이 형태였다. 발판은 사라지고 하부 구조만 남았다. 바닥에는 돌이 깔렸고, 바닥과 측면이 닿은 부분은 오물이 새나가지 않게 밀봉토로 막았다. 발굴된 유구가 화장실이라는 건 ‘경복궁배치도’와 ‘궁궐지’ 기록으로 확인된다. 발굴 유구 토양에서 엄청난 기생충 알(g당 1만8000건도 검출됐다.

양숙자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4∼5칸 규모로 한 칸엔 가림막을 중간에 두고 발판 2개를 놓아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 변기 앞 공간에는 옷을 여밀 수 있는 별도 공간을 뒀고 지붕도 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하루 150명이 사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말했다.
이 화장실 유구는 물을 흘려보내는 정화조(淨化槽) 구조라는 점에서 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정화조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 1개와 물이 나가는 출수구 2개를 갖추고 있다. 조선 시대 민가에서는 항아리에 변을 본 뒤 재를 뿌려 발효시키는 방식이 많았다. 경복궁 화장실 유구는 재 대신에 물을 투입해 분뇨의 미생물 발효 과정을 가속하는 훨씬 과학적인 방식이다.

이장섭 한국생활악취연구소장은 “물은 미생물이 아주 좋아하는 영양분”이라며 “변이 쌓이면 독성이 생기는데 물을 이용해 변을 발효시킴으로써 악취를 줄이고 부피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하부에 쌓이는 침전물은 일꾼들이 따로 ‘푸세식’으로 퍼서 비료 등으로 재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장실은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져 20여년간 사용되다 아관파천(1896)으로 경복궁이 제 기능을 잃으면서 사용 중단됐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장소로 이용되며 완전히 훼손됐다.
정화조를 갖춘 화장실 유구는 백제의 익산 왕궁리 유적과 고려 말∼조선 초기 양주 회암사 유적에서도 나온 적 있다. 하지만 출수구만 있거나 입출수구가 모두 없는 등 지금과 같은 현대식 정화조 구조를 취한 것은 이번 발굴이 처음이다. 이 소장은 “유럽과 일본에서는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분뇨와 생활하수를 처리하는 시설이 정착된 만큼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정화조 시설”이라고 평가했다.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6034738&code=61171111&sid1=cul&cp=du1(국민일보, 2021년 07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