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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어이없을 때가 있을까.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주차 위치를 잊어버렸다. 자주 들르는 건물이었는데 주차 층을 기억하지 못해 두 개 층을 헤매고 난 뒤에야 차를 찾았다. 더 기막힌 건, 이 정도면 치매 걱정도 하고 절망적인 기분도 들어야 할 텐데 나는 예사롭게 웃어버렸다. 내 기억력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낮아서다.

 사람 이름을 기억 못해 더듬거리고, 말하던 중이나 글을 쓰다가도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박는 게 일상사가 된 지는 꽤 됐다. 이젠 기억나지 않는 단어들을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애쓴다고 기억하는 건 아니므로. 그러다 그렇게도 기억 안 나던 이름이나 단어가 전혀 필요 없는 순간 불쑥 튀어 오른다. 이렇게 필요할 때 못 꺼내 쓰는 삐걱거리는 기억력이지만 문득 생각이 나면 이렇게 위안한다. “그래, 내가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었어. 치매는 아니지.”

 30년 전 우리 엄마가 그랬다. 엄마는 나를 앞에 두고도 형제들 이름을 돌아가며 부른 뒤에야 내 이름을 기억해냈고, 뭔가 시킬 때도 늘 “그거 뭐냐”로 시작해 대명사만 늘어놓기 일쑤였다. 심지어 “내가 지금 뭘 하려고 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참 답답했다. “제대로 좀 얘기하라”며 짜증도 내고, “공부 좀 하고 계속 머리를 쓰라”고 잔소리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너도 나이 들어 보라”고 힐난했다. 당시 나는 그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한데 지금 내 모습이 그 당시 엄마 모습이다. 이름 섞어 부르고, 대명사만 늘어놓으며 버벅대기 일쑤다. 그럴 때면 우리 아이도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뭐냐” “제대로 얘기하라”고 다그친다.

 이제야 알았다. 건망증이라는 게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예방법으로도 예방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예방법이라는 게 주로 이런 거다. 호두·등푸른 생선 같은 뇌에 좋은 음식을 먹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메모를 하고, 독서도 하고, 공부도 하라는 것. 한데 그거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뇌에 좋은 음식이 일치하고, 긍정적일 뿐 아니라 낙천적인 면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독서뿐 아니라 칼럼과 책을 쓰는 게 일인데도 절대로 생활 건망증은 호전되지 않는다. 건망증도 노화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과정인 것 같다.

 나를 답답해하는 아이에게 옛 시구를 빌려 말했다. “왕이불가추자년야(往而不可追者年也· 흘러간 세월은 쫓을 수 없고) 거이불견자친야(去而不見者親也· 가버린 부모는 다시 볼 수 없다)이니 나중에 이 일로 하루 걸러 한 번씩 반성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엄마에게 친절하라”고. 나 스무 살 적에 이런 이치를 깨달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다.(6월 8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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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옥 (Jongox Lim)


-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학과 학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과 석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학과 교육학박사. [지리교육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