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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웅의 고지도 이야기

1809년 제작된 일본변계약도(출처: 일본국회도서관)

“다케시마竹島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또한 국제법상으로도 분명히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일본이 예로부터 다케시마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옛날 자료와 지도를 통해 명백히 밝혀져 있다. 17세기 초에는 일본 민간인이 정부(에도막부)의 공인 아래 울릉도로 건너갈 때 다케시마를 항행의 목표로 삼거나 또는 배의 중간 정박지로 이용함과 동시에 강치나 전복 등의 포획에도 이용했다. 늦어도 17세기 중반에는 일본의 다케시마에 대한 영유권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글은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일본은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내용을 세계 각국의 언어로 홍보하고 있으나, 일본의 옛날 자료나 지도 중에는 조선의 땅으로 표시한 것들이 상당히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명확한 자료가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圖’이다. 이 지도는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천체 운행과 편력編曆을 연구하는 직책인 천문방天文方 다카하시 카게야스高橋景保가 막부의 명으로 제작한 것이다.

막부의 천문학자가 만든 지도
다카하시 카게야스(이하 ‘다카하시’)는 1785년 오사카大坂에서 천문역학자인 다카하시 요시토키高橋至時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1795년 막부로부터 역법曆法을 개정하라는 명을 받고 에도에 상경했을 때 에도막부 직할 교육기관인 창평판학문소昌平坂學問所에서 수학했다. 재능을 타고 난 다카하시는 아버지로부터 천문학을 전수받아 관측에 종사했고, 17세 때인 1802년에는 성좌도星座圖를 만들 수준이 되었다.
1804년 몸이 쇠약했던 아버지가 4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당시 천문방은 세습제였으므로 장남인 다카하시가 뒤를 이어야 하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해 바로 실무를 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고향의 천문학자인 하자마 시게토미間重富를 후견인으로 삼아 세습 수속을 일사천리로 진행해 아버지가 타계한 지 3개월 만에 정식으로 천문방에 취임했다.
당시 천문방은 고유 업무 외에도 측량과 지도제작, 지지 편찬은 물론 양서 번역까지 수행해 도쿄대학東京大學 기원의 일익이 되었다. 1804년 7월에는 막부로부터 전국을 측량하는 임무를 맡은 이노 타다타카伊能忠敬의 제1차에서 제3차까지의 측량 결과를 기초로 제작된 동일본東日本의 측량도가 완성되어 막부 장군에게 헌상했다.
1804년 9월 러시아 황제의 국서를 지참하고 나가사키長崎에 내항한 외교사절 레자노프N. P. Rezanov가 통상을 요구했으나, 당시 쇄국정책을 펴던 막부에 거절당하자 1806년 레자노프의 부하가 가라후토樺太(지금의 사할린섬)의 마쓰에번松前藩 거류지居留地를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대외적인 긴장이 고조되면서 막부 내에서는 서양 지리학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때 막부는 세계정세 파악을 위해 1807년 천문방에 세계지도 제작을 명했다. 이 임무에는 다카하시를 비롯한 천문학자 시게토미, 네덜란드어 통역사 바바 사다요시馬場貞由 등이 참여했고, 영국의 지도제작자 아론 애로스미스Aaron Arrowsmith가 1780년에 제작한 양반구형 세계지도를 원도로 세계지도 제작에 착수했다. 지도제작은 당시 실용화되기 시작한 아오우도 덴젠亜欧堂田善의 동판부식법銅版腐蝕法(판화 기법인 蝕刻 凹版法의 일종)을 사용하기로 했는데, 제작에 앞서 테스트로 소형의 ‘신전총계전도新鍋総界全圖’와 ‘일본변계약도日本邊界略島’를 제작하기로 했다.
‘일본변계약도’는 ‘신전총계전도’의 일본 일대의 모습이 소략해지자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구상된 지도이다. 1809년 이 두 지도를 한데 합쳐 두루마리로 만들었는데, 지도의 형태는 오른쪽에서부터 권수에 다카하시의 서문, ‘신전총계전도’, ‘일본변계약도’, 권말에 오쓰키 반스이大槻磐水의 발문이 차례로 들어 있다. 지도의 전체 크기는 가로 93cmㆍ세로 23cm이고, ‘일본변계약도’만의 크기는 가로 34cmㆍ세로 23cm이다.

일본 주변국의 경계를 그린 지도
‘일본변계약도’는 제목 그대로 일본 주변국의 경계를 간략하게 그린 지도로, 1801년 애로스미스가 제작한 ‘ASIA’지도, 이노 타다타카와 마미야 린조間宮林藏의 측량도를 참조해 제작했다. 지도의 방위는 북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지도에 그려진 범위는 북쪽은 북극권北極規, 즉 시베리아西百里亞이고, 남쪽은 북위 20°선, 동쪽은 캄차카반도加模西葛杜加, 서쪽은 중국 서안西安까지이다.
이 지도는 일본과 주변 국가들의 경계를 해안선의 색 띠로 구분했는데, 조선은 황색, 중국은 청색, 러시아는 등색, 일본은 적색이다. 조선의 경우 동해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하고, 현재의 동한만에 울릉도菀陵島와 독도인 천산도千山島를 표기했다. 울릉도菀陵島의 ‘완菀’자는 ‘울鬱’자와 발음이 같은 글자를 취한 것이고, 천산도千山島의 ‘천千’자는 ‘우于’자의 오기이다. 울릉도와 우산도가 이렇게 표기된 것은 1721년 한자로 표기된 목판본인 제3판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밖에 조선의 지명은 8도 도명 외에 백두산은 장백산長白山, 두만강은 토문강土門江으로 표기되고, 섬 명칭은 교동도喬桐島, 정포도井浦島, 흑산도黑山島, 진도珍島, 제주濟州, 남해南海, 거제巨濟, 천성天城, 절영도絶影島 등과 남해에 ‘西人ケルパールドト云(서양인 퀠파트라고 함)’가 표기되어 있다. 1721년 판 ‘황여전람도’에 따르면 ‘井浦島’는 지금의 강화도이고, ‘天城島’는 지금의 가덕도이다. ‘퀠파트’는 1642년 네덜란드 선박 퀠파트Quelpaert 호가 제주도를 발견한 뒤 1648년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지도에 제주도를 ‘Quelpaert’라고 표기하면서 이후 서양 고지도에 표기되기 시작했다.
1810년 다카하시는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를 완성했고, 1811년에는 막부의 허락으로 천문대에 외국 서적과 문서를 번역하는 ‘만서화해어용蠻書和解御用’이란 번역기관을 설치했다. 1813년 천문대 관사가 화재로 전소되어 천문서적을 비롯한 관측 장비, 관측 기록 등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으나 천문대는 바로 중건되었다. 1814년 다카하시는 겸직으로 천문방보다 격이 높은 오늘날 국립도서관의 관리직 같은 서물봉행書物奉行에 임명되었다. 1816년 이노 타다타카가 일본 전토의 측량을 마친 뒤 1818년 작고하자 다카하시가 지도제작을 감독해 1821년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를 완성해 막부에 제출했는데, 이 지도는 막부에 비장되어 국방상 기밀로 외부 반출을 금지했다.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1826년 나가사키에 와있던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 지볼트Siebold가 에도를 방문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크루젠슈테른의 <세계일주기>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도를 입수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대일본연해여지전도’ 소도小圖의 사본과 일본 북방지도 등을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이듬해 나가사키로 보내 주었다. 1828년 이 지도의 유출이 마미야 린조의 개입으로 발각되자 다카하시는 “나라를 위해 한 일”이라고 항변했으나, 지볼트가 귀국하기 전 지도 등을 압수하고 다카하시는 국법을 어겼다고 붙잡혀 심문을 받다가 1829년 45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다카하시 카게야스가 나라의 명으로 제작한 ‘일본변계약도’에는 일본과 주변국의 경계가 확실하게 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해는 ‘조선해’로, 독도는 ‘조선의 영토’로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은 이러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침묵하고,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직도 19세기 서양의 제국주의를 흉내 낸 침략 근성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10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